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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자동차와 섹스하는 여자의 이야기, 새 세상을 꿈꾼다

㊾ 티탄 - 쥘리아 뒤쿠르노

 

영화의 시작은 프랑스이다. 할리우드가 아니다. 루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는 파리에서 ‘기차의 도착’,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등을 찍었다. 종주국인 만큼 프랑스는 늘 영화의 새로움, 혁신을 주도해 왔다. 1950~1970년대까지의 누벨바그를 주도했던 프랑수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의 영화들이 그랬다. ‘네 멋대로 해라’, ‘4백번의 구타’ 등이 있었다.

 

1980년대~2000년대는 누벨 이마쥬의 감독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레오 카락스가 대표했다. 뤽 베송은 할리우드형 대중영화들을 만들었다. 그의 ‘레옹’은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2000년대, 특히 2010년대에는 뤽 베송류의 영화에 회의와 각성이 일었던 시기이다. 브루노 뒤몽과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들은 이른바 ‘프랑스적’ 영화의 복원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이 둘은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뒤몽은 최근 ‘프랑스’라는 영화를 찍었다. 오디아르는 ‘러스트 앤 본’ 등의 영화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리고, 그래서, 마침내 2020년대에 이르자 급기야 ‘新인류’급에 해당하는 감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30대 여성감독 쥘리아 뒤쿠르노가 그렇다. 그녀의 영화 ‘티탄’에 나온 ‘갑툭튀’ 여배우 아가트 루셀도 그렇다. 어디서 이런 배우를 찾아냈을까. 이들 신세대는 과거의 누벨바그니 누벨 이마쥬를 다 뛰어 넘는다. 브루노 뒤몽의 영화와 자크 오디아르를 합치돼 매우 아방가르드하고 프로그레시브한 상상력을 덧칠한다. 영화가 기괴하고 이상한 데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외설의 경계(境界)를 넘나든다. 영화가 극히 위험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새로운 변화는 늘 경계(警戒)의 시선을 갖게 한다. 덥석 손을 잡게 하지 않는다. 사방의 눈치를 보게 만들며 겁을 집어 먹게 한다. 혁명의 시작은 사실 늘 공포이다. 프랑스 새 영화 ‘티탄’은 그런 영화다. 여주인공 알렉시아(아가트 루셀)가 옷을 훌렁훌렁 발가벗고 전면을 드러낸 채 눈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들의 ‘껍데기’를 비웃는 듯이 보일 때, 왠지 큰일의 전조(前兆)가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음이 느껴진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적어도 영화가 바뀌고 있다. 좀 더 작은 규모로 말하면 프랑스 영화만큼은 변화의 몸부림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진보는 파괴에서 온다. 생명은 늘 알을 깨고 나온다. 파란(波瀾)은 파란(破卵)을 통해야 한다.

 

 

영화 ‘티탄’의 줄거리(스포일러를 제외한)는 이렇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알렉시아는 어릴 때 행동과잉 증후군이 있었고, 아빠의 차를 타고 가면서 칭얼거리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 당연히 뇌를 크게 다쳤다. 그래서 머리에 티타늄을 박았는데 이게 결국 그녀를 이상성격의 괴물로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시아처럼 자신이 남과 다르다,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실제로도 고립되고 사회화되지 못하며 동성이든 이성이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알렉시아는 의사인 아버지와 거의 남처럼 살아가며 폭주족들이 드나드는 라이브 바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며 살아간다. 알렉시아는 자신이 차라리 기계와 결합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종종 차 뒷좌석에서 자위를 하는데 마치 차와 섹스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실제로 차가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알렉시아는 ‘자신과 기계(자신이 최애 하는)=자동차’ 사이에 남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알렉시아가 자신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남자들을 가차 없이 죽이거나 그나마 용인하는 관계로 보였던 레즈비언 파트너도 결국 살해하는 건 그런 이상심리이자 이상성욕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아닌 또 다른 자기가 별도의 다른 파트너에게 구애를 받거나 한눈을 파는 ‘꼴’을 보지 못하는 셈이다. 그녀 안에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는 얘기이다.

 

 

몇 건의 연쇄살인으로 당연히 알렉시아는 지명수배를 받는다. 그녀는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남장을 한다. 가슴도 가릴 수 있을 만큼 사이즈가 작다. 머리도 바짝 짧게 깎는다. 그런데 이때부터 진짜 문제가 발생한다. 그녀에게는 뜻하지 않은 아빠(뱅상 랭동)가 생기기 때문이다. ‘새’ 아빠는 소방대장이다. 이 남자는 새로 얻은 아들(사실은 오래전에 납치됐다가 간신히 되찾았다고 생각하는)을 자신의 소방대에서 일하게 한다. 그런데 알렉시아는 그 이전에 이미 이런 저런 난잡한 성관계로 임신을 한 상태이다. 배는 불러오고 남자 흉내를 내며 사는 것도 점점 한계에 봉착해간다. 게다가 새 아빠의 전처는 그런 몸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챈다.

 

가장 큰 문제는 알렉시아가 ‘새로운’ 아빠에게 부성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빠 역시 잃었던 부성을 되찾는다. 이 의사(擬似) 부자관계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 높아진다. 남자와 여자이기 때문이다. 둘은 외형상으로는 동성 근친 관계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무엇보다 진실의 실체이다. 알렉시아는 살인범이다. 그것도 뚜렷한 동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일종의 사이코패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아빠의 역할을 계속 자임하고 나선다면 그건 사회의 근간, 흔히 말하는 법과 질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게 된다. 무엇보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쯤 되면 아수라장이다. 그런데 세상의 혼탁을 일소하고 정돈하기 위해서 사전에 아수라는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런 과정을 통해 신인류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은 아닌가. 우리들 모두 의식적으로라도 아나키(anarchy)한 상상력,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한번쯤 용인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만연돼 있고 파시즘적 광기가 되살아나고 있으며 지구는 환경문제로 멸망 직전에 다다른, 지금과 같은 극단적 혼란의 시대에 세계 질서를 한번쯤 그렇게 무너뜨리고 새로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바벨탑을 아무리 공들여 쌓았다 한들, 그것이 하늘의 가르침을 역행하려 한다면 일단 부수고 봐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래야만 하늘의 노여움을 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영화 ‘티탄’이 추구하는 가치는 그 같은 부숨과 재건설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는 것일 수 있다.

 

‘티탄’은 무엇보다 관계의 재설정에 대한 화두를 꺼내 든다. 여자는 사람을 죽인다. 그녀를 거둬들인 늙은 남자의 직업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다.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던 여자는 자기가 불길 속에서, 혹은 위험 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아이러니에 처한다. 남자는 어차피 죽을 자이든, 죽일 자이든 일단은 구하는 게 직업이다. 하지만 그의 딜레마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아예 죽여서 나머지 다른 산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사람까지 살려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그건 결국 구인(求人)과 구원(救援)의 문제이다. 구원에 도달하는 것은 모순된 과정의 중첩을 통해서일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용서의 행위가 전제돼야 할 수 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구원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관계의 복원과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알렉시아는 남자가 자신이 아들이 아닌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자가 알고 있는데 남자가 그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자신이 알고 있다는, 복잡한 심경의 상황에 놓인다.

 

 

쥘리아 뒤쿠르노가 원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다. 그녀는 새로운 사회와 세상은 새로운 인간(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인류는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존재와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예컨대 알렉시아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애를 갖게 된 것인가, 아니면 자동차와 섹스를 했던 만큼, 차의 애를 가진 것일까. 그렇다면 아이는 인간일까 자동차일까. 이제 젊은 상상력은 트랜스 섹스를 넘어서서 트랜스 휴먼의 단계로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알렉시아의 머리에 박혀 있는 티타늄은 어쩌면 모든 비극과 변화, 새로운 탄생의 시작을 알렸던 시그널일 수도 있겠다.

 

캐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를 연상시킨다. 거기서 여주인공(홀리 헌터)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차의 충돌을 통해 섹스의 오르가즘을 느끼려 한다. 그래서 점점 ‘충돌=죽음’에의 유혹에 빠진다. 문제는 점점 그 강도를 높이려 한다는 데에 있다. ‘티탄’은 그 ‘충돌의 쾌감’이 갖는 의미를 좀 더 내면화 하고 있는 작품이다.

 

쥘리아 뒤쿠르노 스스로 자신의 영화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무대에서 뒤쿠르노가 했던 수상소감 중 나온 표현이다. 영화가 괴물인 것은 사회가 괴물이고 사람 스스로 괴물이 됐기 때문이다. 세상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 영화는 없다. 단 한편도 그럴 수 있는 영화는 없다. ‘티탄’은 괴물의 세상에서 태어난 괴물의 아이 같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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