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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40. 고려 충신의 한(恨) 서린 망경대(望景臺)

 

고려 500년 사직이 기울어 갈 때,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권력에 줄을 서고, 또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고려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이런 현상은 세상이 어지럽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는 시기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나타난다.

 

고려가 망할 무렵 평양조씨 가문에는 그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간 형제가 있었다.

조윤(趙胤, 1351~1425)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의 한 사람인 조준(趙浚)의 아우이다. 포은 정몽주의 추천으로 높은 벼슬까지 하게 되었다. 일찍이 형이 혁명에 가담하려는 것을 알고 눈물로써 말렸으나 형은 듣지 않았다. 조준은 아우의 지조가 굳고 굳어 가히 앗을 수 없음을 알고 조정에 의논하여 영남안찰사로 나가게 하였다. 조윤은 임기가 끝나서도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영남루에 올라 우국시(憂國詩)만 홀로 읊었다. 

 

 

영남루를 지나며/過嶺南樓
삼년 동안 두 번 영남루를 지나니 / 三年再過嶺南樓
은은한 매화 향기 나를 머물라 권하는구나 / 細細梅香勸少留
술 마시며 근심씻고 노년을 보낼 만 하니 / 擧酒消憂堪送老
평생에 이 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 平生此外求不須

 

고려의 운명이 다하니 조윤은 황황히 두류산(頭流山)으로 은거하였고, 이태조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벼슬을 내렸지만 받지를 않았다. 그리고서 이름인 윤(胤)을 견(犬)자가 들어간 견(狷)으로 고쳤으며, 자를 종견(從犬)이라 스스로 불렀다. "나라를 잃고도 죽지 못함은 개와 같은 것이며, 또한 옛 주인을 잊지 못함은 충실한 개와 같다"는 뜻이다. 

 

 

조견(趙狷)이 두류산에서 청계산으로 옮기니, 증조부인 정숙공 조인규가 마음 편히 지내던 곳으로 영당(影堂)을 모신 청계사이다. 여기서 때때로 높은 봉우리에 올라 탄식도 하고 혹은 맑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통곡하였고, 때로는 구름 한 줄기가 송악(松岳)으로부터 청계까지 뻗치니, 이는 공의 충성심에 하늘이 감동한 바라 하여 사람들이 그 봉우리를 망경대(望京臺)라 불렀다. 그 후에 ‘망경대가(望京臺歌)’가 세상에 전하여 불려졌다고 전한다.

 

태조가 그의 충절을 높이 여겨 옛 벗의 예를 갖추고 직접 청계사로 찾아 갔으나 태조를 만나서도 절 한 번 하지 않고 말하기조차 부끄럽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태조는 조견을 가엾이 여겨 "산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으면 네 마음대로 하라."하고, 석실을 지어서 거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견은 태조의 호의를 물리치고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양주(의정부)에 있는 송산(松山)으로 숨으면서 호를 송산이라고 하였다. ‘소나무는 마르지 않고 사시 푸르며, 산은 제자리를 옮길 줄 모른다’는 의미이고, 고려의 서울 송악(松岳)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공이 자손에게, "내가 죽은 뒤에 묘비에 고려안렴사(高麗按廉使)라 새기고 조선개국공신호(朝鮮開國功臣號)는 새기지 말 것"을 명하고, 두 아드님 이름을 석산(石山)과 철산(鐵山)으로 개명하니 이는 곧 굳은 절개의 의미를 가르친 것이다. 자제들이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조선조에서 내린 벼슬 이름을 새겨 비를 세웠더니 그 날 밤에 벼락이 쳐서 비석을 부셨는데, 조선에서 내린 벼슬 이름 있는 데까지만 부러져 버리고 ‘공지묘(公之墓)’란 세 글자만 남아 있어 세상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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