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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 궁민학교(窮民學校)

 

 

쓸 때는 ‘국민’이지만 읽을 때는 ‘궁민’입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모릅니다. 국민(國民)을 가르치는 학교에 궁민(窮民)들만 가득했습니다. 학생들은 궁민인데 학교는 국민이어서, 우리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는 국민과 궁민을 따로 분류하였습니다.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조사를 맡은 담임선생이 질문을 하면 해당하는 아이들은 손을 들어야 했습니다. 담임선생의 질문은 늘 “고아원에 사는 사람 손들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첫 질문에 손을 들던 몇몇 아이들의 하얀 눈동자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가정환경조사 항목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최종학력도 들어있었습니다. 담임선생이 대졸부터 국졸까지 차례로 읊으면, 해당하는 아이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나는 고졸과 중졸에서 한 번씩 손을 들어야 했는데 이유 없이 주눅이 들었습니다. 한 번 들기 시작한 주눅은 질문이 거듭될수록 깊어졌습니다. 담임선생은, 부모의 직업과 사는 동네와 집의 소유와 방의 개수와 승용차와 전화와 TV와 냉장고와 세탁기의 유무에 대해 차례로 물었습니다. 나는, 회사원과 두 칸짜리 셋방살이 말고는 손을 들 기회가 없었습니다. 라디오는 있었지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쓸 때는 ‘국민’이지만 읽을 때는 ‘궁민’이라서 그랬을까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부르던 그 시절에는 ‘가정방문’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가정환경조사가 서류조사라면 가정방문은 현장조사인 셈이었습니다. 모든 가정을 전부 방문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담임선생은 몇몇 집을 건너뛰곤 하였습니다. 국민이기보다 궁민에 가까운 아이들의 집이 그랬습니다. 그렇게 건너뛴 집의 아이들은 담임선생 앞에 자주 불려 나갔습니다. 문제는 늘 육성회비였습니다. 나 역시 예외일 수 없어서, 언제까지 육성회비를 내겠다고 담임선생에게 약속해야 했습니다.

 

약속을 못 지키면, 의자를 들고 벌을 서거나, 대나무 잣대로 두들겨 맞거나, 교실에서 쫓겨났습니다. 가방도 없이 쫓겨날 때면 오도 가도 못하고 학교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철길을 따라 하릴없이 걷다가 배가 고프면, 지키는 사람 없는 밭에 기어들어가 오이를 훔쳐 먹었습니다. 가방은,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담임선생이 교실을 비우면 몰래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고도 집에 돌아가면 육성회비 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가난은, 국민학교에 다니던 궁민학생들에게 명백한 죄악이었습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지 이십육 년이 지났습니다. 가정환경조사나 가정방문을 하는 학교도 더 이상 없습니다. 없지만, 이십육 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國民) 아닌 궁민(窮民)은 여전합니다. 국가가 담임선생을 대신하여 국민으로부터 궁민을 솎아냅니다. 은행에서는 그걸 신용등급이라 부릅니다. 부자일수록 싸게 많은 돈을 빌려주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적게 빌려주고도 비싼 이자를 받습니다. 이자를 갚지 못하면 사회로부터 쫓겨나 길거리를 떠돌아야 합니다. 이제는, 오이를 훔쳐 먹는데도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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