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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아, 김대중이 그립다

54. 킹메이커 - 변성현

 

정치하는 것과 연애하는 것은 사실,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너무 사랑해서 미워하고 또 너무 미워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신파는 정치의 영역에서나 연애의 과정에서 똑같이 벌어진다. 이런 식의 대사는, 그것만 잘라서 들으면 도대체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정치인지 연애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당신이 여기까지 오는 데 오로지 당신 자신 혼자 힘으로 그렇게 된 줄 알아?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 그런데 당신이 이럴 수 있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자 이건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아니면 남자가 남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부터 ‘노골적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담아내고 있는 변성현 감독은 신작 ‘킹메이커’에서도 정치판 두 남자의 얘기를 역시 ‘브로맨스(남자 간의 특별한 감성. 우정을 넘어서는 무엇)’의 빛깔로 그려낸다. 유독 이번 영화에는 의도적으로 게이 감성을 곳곳에 심어 놓는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역의 조우진은 완벽한 여성적 캐릭터이다. 조우진은 이후락을 연기하고 있으며 실제 역사에서의 이후락 중정부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킹메이커’는 1960~70년대의 한국 정치사를 모티프로 한다. 알려진 바대로 김대중의 정치 인생 중의 전반부를 다룬다. 그가 1961년 강원도 인제에서 초선으로 정치권에 데뷔하는 장면을 시작으로(하지만 5.16 쿠데타로 의원 배지를 달지 못했다) 1967년 목포 재선에서 당선되는 과정, 그리고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1970년 전당대회 모습까지를 담는다. 영화에서 김대중은 김운범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설경구가 맡았다. 그를 돕는 남자, 특히 ‘그림자’로 불리며 뒤에서 은밀히 선거 ‘공작’을 펴 나가는 남자 서창대는 이선균이 맡는다. 서창대의 실제 인물은 엄창록이며 그는 당시 네거티브 선거와 흑색선전의 1인자로 손꼽혔던, 배후의 정치인이었다.

 

자 이런 얘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 ‘킹메이커’는 두 가지 지점에서 기획과 연출의 갈림길이 존재했었음을 보여 준다. 영화는 철저하게 실존 인물의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 5,60대의 장년층은 단박에 영화 속 인물들을 과거 역사의 인물들로 오버랩 시킬 수가 있다. 유진산(박인환)이 나오고 김영삼(유재명)과 이철승(이해영)이 나온다. 배우 윤경호가 맡은 역은 누가 봐도 박정희의 권력 찬탈을 돕고 그의 초기 집권기를 같이 했던, 무식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모습이다. 조우진은 위의 얘기대로 박정희가 김형욱을 ‘숙청’하고 그 자리를 메운 이후락의 모습이다. 영화에는 평생 김대중의 좌청룡 우백호였던 권노갑과 한화갑의 모습도 나오는데 배우 김성오와 전배수가 그들이다. 당연히 박정희(김종수)도 나온다. 특별출연한 배종옥은 이희호 여사 역을 해낸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실재하는 인물들, 아직 실존해 있는 인물을 그린 것을 넘어서서 60년대와 70년의 한국 정치사를 거의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를 얼마만큼 인지하고 있느냐가 이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관전 포인트가 된다. 특히 유진산과 양 김(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이철승이 보여 준 삼각, 사각 관계의 복잡성은 60년대 후반과 70년 당시에도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했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다. 이들의 복잡오묘한 정치적 거래는 영화 ‘킹메이커’의 백미를 장식한다. 그래서 실제 이야기를 알고 보는 사람들은 영화가 백배 흥미진진하다.

 

 

자,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2,30대 관객들 가운데 유진산과 이철승을 아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영삼이 누군지도 모르는 세대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가까스로 김대중은 안다고 쳐도 김형욱이니 이후락이니 등은 더욱 더 언감생심이다. 사람에 대해서 모르면 그 사람이 가졌던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역사적 인물을 모르면 그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진다. 영화 ‘킹메이커’가 실재했던 인물을 다루면서도 배역 인물을 다 바꾼 것, 심지어 브로맨스의 설정을 집어넣고 다소 과장됐을 법한 여성적 남성 캐릭터를 배치한 것도 그 같은 판단 때문이다. 흑백의 역사에 컬러의 채색을 하는 것, 허구의 모습들을 삽입함으로써 영화를 먼저 영화‘만’으로 판단하게 하고 그 이상을 아는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그 이상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또 그런 사람들대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영화만 즐기든지, 아니면 영화 이상을 넘나들어 보든지 그건 보는 사람들, 보는 연령층대로 각자가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기획한 이정세와 감독을 한 변성현의 영리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영화의 역사적 고증은 실로 높은 점수를 줘도 모자람이 없다. 특히 공간의 연출은 세트, CG와 버무려져서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1967년 목포 합동유세 장면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김대중의 캐릭터(심지어 공화당의 김병삼 캐릭터)는 물론, 극중 인물들의 의상과 분장, 유달산과 삼학산과 영산강을 배경으로 하는 유세 공간의 미술 감각 등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진부하지만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점을 톡톡히 보여 준다. 특히 1972년의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박정희에 맞서 김대중이 보여 준 장충동 유세 장면은 그 시대를 아는 사람들에겐 ‘판박이’ 소리를 들을만할 것이다(당시 장충동 연설에는 서울 시민 100만 명이 몰렸으며 이에 겁먹은 박정희 측이 온갖 부정선거로 권력을 유지하려 애썼고 이후 김대중 납치 사건 등을 일으키며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까지 꾸미게 된다. 그 이후의 역사는 YH여공 사건을 비롯해 부마항쟁 그리고 10·26 박정희 암살로 이어진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엄창록=이선균=서창대’가 행하는 흑색선전의 ‘마술’을 재현해 내는 부분이 이 영화가 선보이는 압권 가운데 압권이다. 특히 그가 김대중과 갈라선 이후 1972년 대선에서 조작해 낸 지역감정은 그 이후 한국 정치사에도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엄창록은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을 버리고 노태우 쪽에서 일한다).

 

‘킹메이커’의 오프닝 신은 서창대가 자신을 찾아 온 농가의 남자(진선규)로부터 하소연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남자는 암탉을 5마리 키우는데 ‘얘들이 낳는 계란을 옆집 청년 놈이 매일 한 알, 두 알씩 훔쳐간다’는 것이다.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어 고민이하는 남자에게 서창대는 꼼수의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꼼수는 이후 김운범의 선거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반복 재생된다.

 

 

그때마다 김운범은 서창대에게 ‘임자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는 것 같다’며 그를 내치기를 거듭한다. 자신의 선거 공작이 이룬 대가로 지역구 공천을 원했던 서창대는 결국 김운범과 갈라서기를 결심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 본 중정부장의 또 다른 공작도 한몫을 한다. 김운범과 서창대는 각각 상대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심지어 흠모를 넘어서 애정의 단계까지 와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는 합치되지 못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는 현실 정치론과 지더라도 원칙과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정치론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신이 여기에 오르기까지 당신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대화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정치나 연애나 사랑이나 어쩌면 다 신파일 뿐이다. 심순애가 김중배의 금가락지를 좇아가느냐, 아니면 이수일과의 순정을 지키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 사람들은 심순애가 이수일을 버린 것에 대해 두고두고 욕을 하지만 현실의 사람들, 자신들 역시 늘 그렇게 돈을 선택한다는 것을 안다. 영화 ‘킹메이커’를 보면서 서창대가 일관되게 정치의 ‘흥행성’을 주장하는 모습보다 그를 내치지도, 품 안에 안기도 어려워서, 고심하는, 그렇게 ‘정치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김운범의 모습에 더 마음이 기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선택은 쉽다. 선택하지 못하고 왔다갔다하는 모습에 진실이 더 가까이 있다. 김대중이 늘 그랬을 것이다. ‘킹메이커’를 보고 있으면 실로 김대중이 그리워진다. 지금의 한국 정치판이 연상되면서 더욱 더 그런 마음이 든다. 지금, 우리에게 김대중과 같은 인물은 누구인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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