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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리코리쉬 피자에는 리코리쉬 피자가 나오지 않는다

55. 리코리쉬 피자 -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 ‘리코리쉬 피자’에는 리코리쉬 피자가 나오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를 암시하는 대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리코리쉬 피자는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판매망이 구축된 체인점 레코드 숍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런 뜻이 없는 척 미국인들, 특히 7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 ‘리코리쉬 피자’가 과거의 얘기를 하는 작품이란 걸 알게 만든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영화 제목이 ‘난다랑’인 셈이다. 난다랑은1980년대 초중반 서울 여기저기서 성업했던 카페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리코리쉬 피자’는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 개리 고츠만의 실제 성장담을 극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츠만은 ‘나의 그리스식 웨딩’, ‘맘마미아’, ‘폴라엑스’, ‘더 파크랜드’ 등을 제작한 인물이다. 개리 고츠만과 이 영화를 만든 폴 토마스 앤더슨은 가까운 사이다. 고츠만은 1952년생, 앤더슨은 1970년생이다. ‘리코리쉬 피자’의 주인공 이름은 개리이며 그의 15살 때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아마도 개리 고츠만은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 평소 ‘라떼에는(‘나 때에는’을 우습게 표현한 말)’ 방식으로 수다를 떨곤 했었을 것이다. 그걸 평소 귀담아 듣던 폴 토마스 앤더슨이 어느 날 진짜로 이야기를 엮어 낸 것이다.

 

 

‘리코리쉬 피자’의 개리(쿠퍼 호프만, 약물사고로 사망한 할리우드의 위대한 배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아들)는 15살이다. 아역배우를 하고 있는 중인데 끝물이다. 이제 덩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당연히 CF 출연도 하면서 부모 세대만큼, 부모 세대 이상으로 돈을 번다. 개리는 광고 문안도 곧잘 쓰는 등 어린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사업 수완이 만만치 않다. 그는 결국 청소년임에도 물침대 사업을 벌인다.

 

이 개리란 아이가 흠뻑 빠진 여자가 알라나(알라나 하임. 하임 밴드의 멤버로 하임 밴드는 시스터 그룹이다. 알라나는 그중 막내)인데 이 친구는 25살이다. 15살 남자 아이와 25살 여자는 안 그러는 척 밀고 당기는 연애를 시작하며 영화는 이 둘의 성장기를 그린다. 이 영화가 레트로-하이틴 청춘물이라는 얘기다.

 

‘리코리쉬 피자’를 좀 더 재미있게 즐기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간중간에 숨겨져 있는 그림들, 그 퍼즐들을 풀어 나가야 한다. 극 전반부 주인공 개리가 출연하는 어떤 老여배우의 버라이어티 쇼 무대는 루실 볼의 것이다. 루실 볼(1911~1989)은 195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TV스타이며 국내에도 방영된 적이 있는 시트콤 ‘아이 러브 루시’의 주인공이다. ‘리코리쉬 피자’에 나오는 장면은 루실 볼이 전성기를 지낸 후 캘리포니아에서 펼쳤던 토크 쇼 무대를 극화한 것으로 보인다.

 

여주인공 알라나가 10살이나 어린 개리에게 보란 듯이 ‘노친네’들 옆에 앉아 그들과 즐기는 척 군다. 이때 나오는 잭 홀든(숀 펜)은 70년대 당시엔 원로 배우 급이 된 윌리엄 홀든이다. 바에서 그를 만나 너스레를 떠는 친구 렉스(톰 웨이츠)는 미키 루니 같은 배우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술을 마시며 ‘도곡산! 도곡산!’하고 구호를 외치는데 이건 윌리엄 홀든의 1954년 출연작 ‘원한의 도곡리다리’를 의미한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홀든과 그레이스 켈리, 미키 루니 등이 출연했다.

 

개리와 친구들, 알라나가 물침대를 배달하는 할리우드 배우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는 아마도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존 피터스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얘기를 하는데 크리스토퍼슨과 스트라이샌드는 1976년 ‘스타 탄생’에 같이 출연했다. 이번 영화에서 존 피터스 역을 맡은 브래들리 쿠퍼는 레이디 가가와 2018년 ‘스타 탄생’을 리메이크한 ‘스타 이즈 본’에 출연하기도 했다. ‘리코리쉬 피자’는 이렇게 얽히고설킨 할리우드의 관계사를 살짝살짝 숨겨 놓고 있어 그 맥을 알고 보면 아주 흥미롭다.

 

 

영화 ‘리코리쉬 피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미국의 70년대 문화와 정치사회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하다. 영화는 콘텍스트를 이해해야 텍스트가 읽힐 때가 많은데, 이 영화가 전형적으로 그렇다.

 

영화 속 존 피터스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 얘기는 자동차 주유 때문에 빚어지는 이야기다. 이를 전후로 닉슨의 국민 담화가 TV로 중계되는 장면이 나온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을 전후해서 벌어졌던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1차 석유파동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미국과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해 석유 생산량을 의도적으로 줄이고 가격을 올린 것 때문에 시작됐다.

 

그러나 원초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제4차 중동전쟁 때문이었다. 세계는 언제 화약고로 변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시절이었으며 무엇보다 석유난으로 경제적 피해가 극심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닉슨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1973년은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국민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자진 하야를 결정하기 직전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이렇게, 대내외적 혼란기에 청춘을 보냈던 사람의 눈으로 기록한 미국 현대사의 측면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리코리쉬 피자’를 보면 들게 되는 생각 중 가장 큰 의문 아닌 의문은 ‘왜 1970년대인가?’다.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상당수가 1970년대, 더 나아가 1960년대에 대한 시대적 회고나 향수를 보일 때가 많다. 1970년생인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 1970년대는 무엇인가. 할리우드와 미국에게 70년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우리 모두에게 70년대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가장 자유롭고, 미래비전의 가치가 어떤 방식으로든 유지됐던, 그럼으로써 희망이 남아 있었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상과 사조(思潮, 예컨대 히피즘도 그중 하나이다), 사회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다양한 예술이 꽃피웠던 시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가장 순수했던 정신을 지니고 있었던 시대였다.

 

 

실제로 미국인들 중 상당수가 1968년 로버트 케네디 암살 이후, 일명 아메리칸 드림은 끝이 났으며 미국의 미래는 거기서 멈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 지식인들 중 상당수 역시 19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에 벌어진 프랑스 6.8혁명의 실패가 사실상 인류 발전의 전면적 후퇴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는, 아는 사람들에게는, 인간문명과 문화가 최고조였던 시절을 의미한다.

 

미국은 1980년대 레이건의 등장 이후 급격하게 보수 자본 반동화됐다. 세계도 마찬가지다. 소련 블록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급격한 세계화는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사람들의 삶의 질과 만족도가 하향평준화 되기 시작했다. ‘리코리쉬 피자’는 그 시절에 대한 복고를 강렬하게 갈구하는 듯한 영화이다 이는 거꾸로 지금의 시대가 1970년대의 끝자락도 따라가지 못함을 보여 준다. 영화의 웃음 뒤에는 그런 자조와 회한이 담겨져 있다.

 

‘리코리쉬 피자’는 결국 그리움에 대한 영화다. 그러한 한편으로는 애잔하고 슬픈 정서가 느껴진다. 그걸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당신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자, 당신은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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