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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여성의 해방, 세상의 해방

60. 레벤느망 - 오드리 디완

 

레벤느망은 우리말로 사건이다. 영어로 event, happening으로 나와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accident가 맞다. 사고다. 영화 ‘레벤느망’의 주인공 안느 뒤신(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은 영화 속에서 사고를 당한다. 뜻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임신이라는 사고. 그녀는 이 사고 때문에 거의 죽을 뻔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임신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안느가 1940년에 출생했다는 점, 이야기가 벌어지던 때는 그녀가 23살이니까 현재 (우리 식으로) 1964년이고 배경은 프랑스라는 점이다. 이때 프랑스뿐만 아니라 거의 전 세계적으로도 중절 수술이 불법화돼 있었던 때이다.

 

물론 지금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시대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이슈는 여성 인권의 사안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그 금지의 수위를 낮춰 왔다. 가톨릭에서는 여전히 태아를 죽이는 일을 살인 행위로 간주한다. 우리나라는 2019년에 이르러서야 기존 낙태죄를 폐지하면서 임신중절의 합법화 길을 열었다. 여성 스스로 자기 결정권에 의해 임신 14주 이내에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레벤느망’에서 안느는 임신 10주째 돼서, 불법으로 낙태 수술을 해 주는 非의사에게서 아기를 뗀다. 극히 위험한 짓이었고 당연히 생명에 지장이 온다. 안느는 기숙사 화장실에서 10주 된 태아를 밑으로 쏟아 내며 혼절한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화 ‘레벤느망’을 두고 ‘수위가 너무 세다’는 말이 나왔던 이유다.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끔찍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두고 르 몽드는 이렇게 썼다. ‘간결하고 급진적이다’. 할리우드 리포트는 이렇게 썼다.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며 숨이 가쁜 영화다’. 르 몽드가 더 정확하게 영화의 감성을 전달한다. 영화는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1964년이 배경인 영화가 왜 그런 평가를 받는가. 급진적이라는 수사(修辭)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거꾸로 지금의 세상이 진보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비판이다. 영화 ‘레벤느망’은 1960년대 여성들이 받았던 고통을 떠올리게 하며 왜 지금의 세상은 보다 여성적이고, 보다 계급·계층적인 측면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가를 우회적으로 보여 주려 한다.

 

그것이야말로 감독 오드리 디완이, 1974년에 발표된 아니 에르노의 동명 원작 소설을 지금에 와서야 영화로 만든 이유이다. 이건 바.로. 지.금.의. 얘기라는 것이다. 여성의 권리는 여전히 침해받고 있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수세적이게 하고, 당당함보다는 변명으로 일관해야 하는 삶을 강요받고 있다는 얘기이다. 현재 페미니즘의 올바른 정치학이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인 셈이다. 아니 에르노는 현존하는 프랑스 작가들 가운데, 영화에 대한 르 몽드와 할리우드 리포트의 평가를 섞어 얘기하면, 정직하고 급진적이다. 이 소설은 자전적인 데다가 진보적이다. 디완 감독이 뒤늦게나마 영화화를 결심한 이유이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생이고 주인공 안느처럼 낙태수술을 경험했었다.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한 여자’ 역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얘기이다.

 

1964년은 프랑스 전역에서 68혁명의 불길이 일어나기 직전에 해당한다. 주인공 안느가 낙태 문제로 혼자의 힘으로 세상과 치열하게 싸워 나갔듯이 68혁명도 세상의 모든 금기에 도전했던 시대의 운동이었다. 프랑스 68은 1968년 5월 프랑스의 문부상이었던 작가 앙드레 말로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원장이었던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이후 68은 학생과 지식인, 노동자들이 연대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투쟁, 곧 기득권과 특권계층 중심의 세상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번져 나갔으며 세계의 민권운동(인종주의 등 모든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과 결합하면서 거의 시가전에 이르는 전시 상황으로 확대됐다. 프랑스와 세계는 심한 홍역을 앓았다.

 

 

안느가 그렇게나 애써가며, 그러니까 스스로의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애를 지우려 했던 이유는 여성이 임신을 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학내 규칙 때문이다. 무엇보다 낙태를 하다 ‘걸리면’ 감옥에 간다. 그런 여성을 보호해 준 사람도 감옥에 간다. 안느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면서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곁을 떠나는 이유다. 안느가 괴로운 것은 원치 않는 임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고립될 수밖에 없는 학내 환경이자 사회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안느가 낙태를 강행하는 것은 아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모성애는 자기애에서 발현된다. 이타주의가 모성의 시작은 결코 아니다. 안느는 자신이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고 여성으로서 주체적으로 우뚝 서야 아이에게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투쟁’의 과정이 실로 눈물겹다. 정상적인 병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한 걸 알면서도 안느는 시중의 산파 같은 여성에게서(이 여성의 목소리는 굵고 허스키한데 그건 마치 남성이 여성에게 임신을 시키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여성을 파멸시키는 폭력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를 연상시키려는 의도로 읽힌다) 시술을 받는다. 그전에도 그녀는 이미 본인 혼자서 기숙사 방에 수건을 깔아 놓고 꼬챙이를 자신의 자궁 속에 넣고 휘저으며 아이를 떼어 보려고 한다. 당연히 몸에 좋을 리가 없다. 그러한 행위를 직접 목도하며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관객들의 심사도 좋을 리가 없다. ‘레벤느망’은 고통스러운 영화가 맞다.

 

 

낙태만이 여성의 권리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주체 결정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찍고 있는 방점이자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목소리이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세상의 모든 부당한 금기, 억압을 뚫고 나간다는 것은 결국 계급과 계층의 해방이라는 사회운동과 맞닿을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결국 계급운동인 바, 양측 간의 괴리가 발생하고, 그 틈이 지나치게 벌어지면서 오히려 여성운동이 변질되고 퇴보하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여성운동은 여성만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동반·연대해서 자유를 얻는 것이며,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가부장적, 남성 중심적, 계급주의적인 상황들을 이겨 내는 것이다. 여성운동의 방향은 바로 그것이며 영화 ‘레벤느망’이 전개 방향도 그런 점과 합치되는 것이다.

 

안느의 친구 쟝(케이시 모테 클레인)에게 임신했다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쟝은 임신한 김에 자신과도 한번 섹스를 하자는 얘기를 한다. 안느를 임신시킨 남자 대학생은 그녀의 몸 상태보다 친구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한다. 그는 끝내 책임을 지지 않는다. 1960년대의 남성들 인식이 얼마나 저열했는지를 보여 주지만 현대의 남성들 역시 그 궤도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 있지는 못한 상태이다.

 

왜 2021년의 베니스영화제가 이 영화에 황금사자상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주었을까. 세상이 봉착해 있는 페미니즘의 해법, 그 원류를 되새겨 보자는 의미를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문제 해결을 위해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역사를 되짚고 되짚어 나가면서 상황이 가장 심각했던 때를 뒤져내는 습성을 지닌다. 과거 가장 심각했던 때를 들여다보면 지금의 상황과 그 해결 방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의사와 불법 시술자에게 다리를 벌리고 눕는 주인공 안느를 보고 있으면 그녀의 현재 상황이 부끄러움이나 수치스러움을 뛰어넘을 만큼 심각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절박함이 공유돼야 한다고, 오드리 디완 감독은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딸을 세상의 엄마가 되게 하고 싶은가. 그럼 그녀를, 당신의 딸들을, 먼저 해방시키라. 자유로운 존재로 받아들이라. 죽을 때까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살게 하라. 여성의 해방은 세상의 해방이고 세상의 자유는 여성의 자유이다. 이젠 그 점을 만고의 진리로 받아들일 때가 됐다. 아니 지나도 훨씬 지난 얘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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