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동(內洞)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 지형에 형성된 동네로 산록완사면에 가옥들이 위치하는데 대청1리 서내동, 대청6리 동내동, 대청7리의 양지동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마을 주위의 산은 삼각산(해발 343m)에서 시작해 동북쪽으로 뻗은 검은낭 산줄기와 삼각산 북쪽으로 뻗어나가 옥죽포 달래끝뿌리에서 멈춘 양쪽 산줄기 사이로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 논으로 경작되는 넓은 들판은 대청면의 유일한 평지인데, 이곳은 지형이 낮아 서내동 쪽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마치 강과 같다 해 ‘강틀’이라 부른다. 현재 ‘강틀논’ 일대는 과거에 바닷물이 마을 깊숙이 들어오고 나가며 형성된 갯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내동 동북쪽에는 방사방풍림으로 소나무 군락지가 있고 방죽을 쌓았다 해 ‘축동(築洞)’이라 부르며, 여기에는 잡귀를 쫒아내는 수호신으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우람한 장승이 있었다 해서 다른 말로 ‘장승백이’라 부른다. 이곳을 경계로 옥죽동과 구별된다.
현재 내동에는 2022년 3월 기준으로 모두 317세대 471명이 살고 있으며 대청1리 146명, 대청6리 274명, 대청7리는 71명이 각각 거주하고 있어 동내동이 중심지 역할을 했다.
▶ 대청도의 전통 시대 중심지
내동이라 불리는 시기와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성(城) 안쪽에 형성된 마을을 ‘성내동(城內洞)’이라 부르듯이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에 형성돼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강틀논’에서 농사하는 주민들이 있어 일제강점기 선진동 일대에 어업이 활성화되기 이전 대청도 경제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1910년대 거주 인구도 281명으로 선진동의 2.4배일 정도로 월등히 규모가 컸다.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220년 전인 조선 정조 때에는 대청도가 서해 국방상의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면서 동내동에 1799년 ‘대청진(大靑鎭)’이 설치돼 95년 간 유지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진됐다. 그 후 청사는 1930년까지 존재하다가 철거됐다.
또 100년 전 김학선(1864년생)이 대청진 건물을 이용해 1921년 대청사숙(大靑私塾)을 열어 일제강점기에 주민과 학생의 문맹퇴치 운동에 앞장섰고, 마침내 1932년 대청공립보통학교로 승격했다. 이렇듯 내동 중 동내동은 군사와 행정 기관, 교육시설이 위치했던 전통 시대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당시 지역사회의 원로격이던 김학선이 외국인을 비롯한 외부인에 의해 내동의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도박, 흡연, 음주, 매음 활동을 금지하는 마을 규칙(洞規)을 만들어 대청도의 전통을 지키며 자치촌을 만들고자 했던 곳도 바로 내동지역이다.

▶ 내동의 역사적 사실과 지명
한편 대청초등학교 자리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당시 고려인 기황후의 남편인 원 순제(토곤테무르, 재위 1333~1370)가 왕위에 오르기 전 1년 반 동안(1330년 7월~1331년 12월) 계모의 모함에 의해 귀양온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살았던 건축물의 주춧돌이나 관련 부재가 거의 없는 편이고 과거에 기와편이 수습된 적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동에는 옛날에 수백 년 된 대여섯 아름이나 되는 큰 뽕나무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오랜 뽕나무 위 가지에 이른바 ‘겨우살이’라는 상록의 풀나무인 ‘상기생(桑寄生)’이 돋아 있었는데, 이것은 돋아나서 10여 년 후에야 약용으로 효과가 있다는 희귀한 약재다.
이같이 상기생이 나는 뽕나무는 전국에서 대청도 내동에 있는 뽕나무가 유일했다고 하며 동내 조관규씨 집 앞 논둑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확실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이 상기생을 따다가 달인 물로 조선 중종 왕후의 병을 고쳤다고 전하며 나라에서는 그 보답으로 대청도에 옥관자(玉冠子)와 각대(角帶)를 하사했는데 그 나무에 걸었다고 전한다.
이 뽕나무를 발견한 사람은 옛날 황해도 강령현감이라 전해지는데 시기는 불확실하나 서해에 해적 출몰이 극심하던 때 대청도로 해적들을 수색 토벌하러 왔다가 발견하고, 이같이 귀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 이름을 강령현감 자신의 이름을 따서 ‘홍덕휘(洪德輝) 뽕나무’라 했다는 옛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과장된 측면이 있고 1431년(세종13)에 백령‧대청도에서 상기생 50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어 희귀하긴 하나 대청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내동 일대를 ‘장안(長安)’이라 부르며, 대청군도의 주산인 ‘삼각산(三角山)’이란 명칭도 원 순제가 대청도를 자기의 왕도(王都)라 생각하고 이곳 지명을 중국 당나라 왕도의 지명을 따서 붙여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유지명으로 대청1리인 서내동 일대에 매막골, 석장골, 바닷가쪽으로 응골, 도장골, 제비아가리, 난추니낭 등이 있고 대청6리인 동내동 일대는 심촌몰, 백촌몰, 장승백이, 강틀, 학골, 옥박골 등이 있다. 대청7리인 양지동 일대는 대궐터 논밭, 재피골, 재피골 말래, 작은미아골, 농여, 나이테 바위, 너덩여가 있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