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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세상은, 최고의 XX놈이 차지한다

63. 뜨거운 피 - 천명관

 

인기 작가 천명관이 ‘용감하게’ 감독한 영화 ‘뜨거운 피’는 안타깝게도 극장에서 홀대를 받고 있다. 그의 데뷔는 처절할 만큼 천대받고 있다. 그런데 꼭 그럴 작품은 아니다. 물론 솔직하게 얘기하면 ‘뜨거운 피’는 썩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할리우드 갱스터 무비, 일본의 야쿠자 영화들에게서 느껴지는 ‘어깨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소설가 출신이어서인지(이야기꾼의 수다가 많아서인지) 영화가 전체적으로 불균질한 느낌을 준다. 그건 그가 워낙 서사에 ‘미련’이 많고, 그러다 보니 에피소드를 층층이 쌓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러다 보니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복잡하다. 아주아주 복잡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중간에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형국의 이야기야’라고 볼멘소리를 할 법도 하다.

 

예컨대 주인공 희수(정우)와 동거녀인 인숙(윤지혜)의 관계 같은 것이다. 희수는 인숙을 연모한다. 인숙은 한때 원룸을 다니며 몸을 팔았고 그 와중에 애를 낳았다. 그녀의 문제 많은 아들이자, 희수에게 의사(擬似) 부자 관계를 갖게 하는 양아치 건달인 아미(이홍내)는 끊임없이 전체 이야기 속으로 들락날락한다.

 

 

아미야말로 사실은 희수가 영화 전체에서 겪고, 일으키는 모든 사건의 단초가 된다. 그래서 중요한 인물이다. 이 캐릭터를 버리거나 줄일 수가 없다. 그런데 조금은 스타카토 식으로 갔으면 좋았을 법했다. 아미 때문에 너무 사건이 복잡해진다. 무엇보다 희수의 심사가 복잡해진다. 희수는 알고 볼 것도 없이 깡패이고 건달이다. 그래서 자기 여자에게조차 “나는 너를 평생토록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어!”라는 말을 듣는 존재에 불과함에도 이 양아들 아미 때문에 살짝 멋있어진다. 그래서 그의 행동 동기가 흐트러진다. 천명관 감독이 그 부분을 좀 다듬었어야 했다고 본다.

 

마틴 스콜세즈가 만든 ‘좋은 친구들, GoodFellas’의 위대한 점은 거기에 나오는 인간들은 돈과 여자 앞에서 모두가 사악한 동기만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들 중에 하나가 영웅적 행동을 하거나 인간미를 갖추면 그건 진짜로 그냥 영화가 되는 것이다. 진짜 현실은 아닌 것이 된다. 갱스터 무비는 그 점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다 알고 나면 그럴 것도 없지만 영화란 늘 다 알기 위해 이야기를 계속 앞으로 전진해가야 하는 운명인 만큼, 중간에 살짝 ‘저게 어떻게 된 거지’라는 우물거림만 생겨도 전체 그림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뜨거운 피’는 인물을 좀 줄였어야 했다. 깡패들이 너무 많다. 그냥 숫자가 많은 게 아니고 종류가 너무 많다. 그런 점이 좀 따라가기가 힘들다.

 

전체 이야기 구조를 구암 포구의 이권을 둘러싼 남 회장(김종구)과 손 영감(김갑수)의 대립 구도로 좀 더 강하게 틀어쥐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여기에 남 회장의 수족 최철진(지승현)과 주인공 희수의 오랜 관계가 얹히고, 양동(김해곤)이 벌이는 바다이야기류의 불법사업, 미친개 용강(최무성)이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청부폭력, 희수가 5000만 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는 불법 도박 하우스 사장(윤제문)까지. 그리고 남 회장 밑에서 ‘여자 장사’를 해서 포주로 불리는 중간 보스급 남자(정호빈)의 존재 등등 인물들이 겹겹이 얹힌다. 이런 정도의 인물 수라면 2시간 분량의 영화가 아니라 요즘 유행처럼 8부작 수준의 드라마로 만들었어야 했다. 극장용 영화로서는 아무래도 그 지나친 부피감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가 꽤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건 영화 전편에 흐르는 부산 사투리의 밀도감과(그것 때문에 종종 대사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 점도 있었으나) 차진 대사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희수가 포주男에게 하는 이런 대사다. “세상은 멋있는 놈이 차지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세상은 결국… 최고로 XX놈이 갖더라고요”. 이걸 부산 억양의 사투리로 상상해 보시길 바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최고로 XX놈’이란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영화의 배경은 구암 포구다. 가상의 공간이다. 부산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이 공간에 대한 느낌 때문에라도 영화가 낯설 수 있다. 짐작건대 영화 속 구암은 부산 서구와 중구의 접점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것도 못 알아들을 것 같으면 그냥 구암을 중구 남포동 자갈치 시장의 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 마디로 변두리라는 얘기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구암 같은 곳’이 왜 깡패들의 소굴이 되고, 더더군다나 이 보잘 것 없는 곳을 차지하려고 그렇게들 난리굿을 펴는지(사람이 몇이나 죽어 나가는지 모를 만큼)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열쇠는 남 회장과 손 영감의 대사이다. 근데 그 부분이 좋다. 그리고 그 대사야말로 영화 ‘뜨거운 피’의 핵심 테마이다. 남 회장은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말한다. “구암은 별 볼일 없는 동네지. 시골이지. 근데 거기를 차지해야 딴 데를 먹어. 그래서 중요한 거야”. 손 영감의 대사도 비슷하다. “이 못 사는 구암을 차지하려면 꼭 피를 봐야 해. 피바람이 불어야 하는 거지”. 그 순간 영화에 대해 ‘아하’ 하는 깨달음이 온다.

 

그건 마치 류승완이 ‘짝패’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온성이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이 세상이 얼마나 약육강식의 폭력으로 물들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구암은 지금의 세상이다. 큰 세상을 차지하려는 자, 작은 세상에 눈독을 들인다. 작은 파도가 큰 파도를 만든다. 천명관 감독과 이 영화의 원작을 쓴 소설가 김언수의 생각이 그러했을 것이다. 작은 포구 구암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세상의 폭력과 인간의 야만성을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뜨거운 피’는 꽤나 큰 유의미성을 지닌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이 영화에 비교적 높은 평점을 주고 싶어진다. 관객들이 그 진정성을 너무 못 알아주고 있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두 가지의 단점을 지나치면 이 영화는 곰곰이 들여다볼 대목이 참으로 많은 작품인 것이다.

 

영화는 다소 ‘오버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끊임없이 칼로 찔러대고 쑤셔댄다. 특히 옥 사장(차순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잔혹성은 마음 약한 관객들은 다소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들이야말로 이 영화가 취하려는 ‘폭력의 미학’의 목표일 수 있다. 영화는 종종 고도(高度)의 폭력을 전시함으로써 폭력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한다. 캐나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아예 ‘폭력의 역사’라는 영화를, 그리고 ‘이스턴 프라미스’라는 제목의 폭력적인 영화를 찍었다. 미국의 샘 페킨파는 ‘와일드 번치’란 영화로, 한국의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 등 이른바 복수 3부작으로 그 점을 설파한 적이 있다. ‘뜨거운 피’는 그 계보를 이을 만하다.

 

배우들의 연기가 최고급이다. 정우의 연기는 이제 한 지점을 통과했다. 김해곤, 최무성의 연기도 일품급이다. 김갑수 옹(?)은 말할 것도 없다. 윤제문은 다소 분량이 아까울 정도다. 도박 안 한다고 자른 손가락, 마약 안 한다고 자른 손가락을 보여주며 징징대는 비루한 옥 사장 역을 한 차순배는 조연 연기의 최고봉이다. 어디서 이런 배우들을 끌어모았을까. 여성들이 끼어들 틈이 없는 만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다른 측면에서 논의할 만한 영화다. 그런 논쟁이 기대되는 바이다. 근데 지금 세상에서 최고의 XX놈은 누구일까. 각자가 찾아보시기들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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