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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칼럼] 극히 괴롭고 고독한 시대의 전야(前夜)에 부쳐

 

평소 영화를 잘 안 보는 사람들이라도 한 번은 들어 봤고 또 한 번 정도는 봤었을법한 영화가 홍콩 왕가위의 작품들이다. 그의 초기작 ‘열혈남아’와 ‘아비정전’, ‘중경삼림’과 ‘동사서독’ ‘타락천사, 또 ‘화양연화’와 ‘해피투게더’, ‘2046’을 거쳐 비교적 최근에 속하는 2013년작 ‘일대종사’ 까지, 왕가위의 영화들은 희대의 걸작들이다. ‘일대종사’ 이후 그는 연출을 하지 않고 있는데 풍문에 따르면 그 역시 TV 드라마를 시작하려 한다고 한다. 뭐라? 왕가위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상실과 공허의 정서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들에는 늘 이별이 있고 사람들의 관계는 항상 이어지지 못한다. 사람들의 일상은 파편적이며 목적을 찾기가 힘든 모습들이다. 그저 실존의 아픔을 견디며 고독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반복해 간다. 그런 왕가위의 작품들을 보는 사람들은 영화가 주는 ‘작위적인 행복’ 보다 ‘리얼한 불행’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왕가위의 영화는 머리는 어둡되 가슴은 촉촉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왕가위의 지성은 늘 비관적이지만 의지는 그래도 약간이나마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왕가위가 그렇게 된 데에는 홍콩의 역사와 정치가 깊이 연관돼 있다. 왕가위 영화 연출 인생의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된 작품은 ‘중경삼림’과 화양연화’ 그리고 ‘2046’이다. ‘중경삼림’은 1994년에 찍었는데 1997년에 홍콩이 영국에 반환되기 3년 전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남녀는 늘 헤어진다. 그리고 모두들 어디론가 떠날 것을 늘 준비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이직(移職)도 쉽다. 주인공인 경찰 663(양조위)은 나중에 매점 주인이 된다. 원래 매점에서 일하던 페이(왕페이)는 스튜어디스가 돼 미국을 오가며 살아가게 된다. 매점에서는 끊임없이 마마스 앤 파파스의 1965년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큰 소리로 빵빵 터져 나온다. 영화 중간중간에는 아일랜드 록그룹 크랜베리스의 1992년 노래 ‘드림스의 왕페이 버전', 곧 광동어 버전이 흐른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1960년대와 1990년대를 오가며 그 시대적 흐름을 이어가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958년생으로 왕가위는 유년시절에 1967년의 홍콩 봉기 사태(홍콩 노동자들의 전국 쟁의로 영국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된다. 이때 노동자들을 도왔던 것은 중국 공산당이었지만 이후 2019년 홍콩 시위사태 때는 중국 공산당이 홍콩 시민과 대학생들을 탄압하고 영국과 서방이 이들을 돕는다.)를, 그 불안한 시대의 아우라를 직접 겪었다. 홍콩은 영국도 아니고 중국 대륙도 아니며, 홍콩 자신도 아니고 자신이 아닌 것도 아닌, 늘 경계의 존재임을 ‘생래(生來)적으로’ 알게 된 왕가위는 그 실존의 불안을 자신의 작품 속에 투영시킨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불륜의 두 남녀(그런데 이 불륜에는 기이한 정당성이 있다.)가 만나는 것은 1966년이다. 홍콩봉기 전야의 극도로 불안한 정정(政情)이 영화 전편에 흐른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차우(양조위)는 신문사에서 일하지만 기자인지 아닌지 명확하지가 않다. 그는 늘 (모두들 시위 취재를 나간 듯이 보이는) 텅 빈 편집실에 거의 홀로 앉아 신문 무협 연재소설을 쓴다. 그렇게 해서 번, 약간의 돈을 그는 도박에 쓴다. 차우는 결국 불륜과 소설 쓰기에 매진하는데 여주인공 첸 부인(장만옥)은 그의 글의 감수(監收)를 본다. 그러기 위해서 두 남녀가 이용하는 곳이 바로 한 호텔의 2046호이다. 

 

두 사람은 종종 이별 연습을 한다. 여자의 남편에게 둘 사이가 발각돼서, 혹은 그 반대여서, 그것도 아니면 불륜은 반드시 헤어져야 할 운명임으로, 미리미리 이별 연습을 하자는 식이다. 그런데 어느 날 첸 부인은 그 ‘리허설’에서 실제로 펑펑 운다. 차우는 그런 그녀를 안아 주며 ‘연습인데 왜 그러느냐’고 한다. '화양연화'는 2000년에 만들어졌고 이미 홍콩은 1997년에 반환됐지만 2046년에는 홍콩이 중국으로 완전히 귀속되기로 결정된 상황이었다. 이별 연습은 단순히 연습이 아닌 셈인 것이다.

 

1968년 캄보디아를 취재하러 갔다가 돌아온(이때는 베트남 전쟁이 이미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확산된 때였다.) 차우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그렇게 번 알량한 돈으로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신다. 당연히 여자 품을 전전한다. 캄보디아에서도 도박을 했고 그런 그에게 도박 빚을 꿔주며 잠깐 사랑에 빠진 여자가 우연찮게도 과거 홍콩에서 만났던 여자와 성이 같은, 수리 첸(공리)이다. 홍콩으로 돌아와서는 예전에 썼던 2046호에서 잠시 몸을 섞던 여인 미미(유가령)가 누군가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치우는 어쩔 수 없이 2047호에 들어오게 된다. 호텔 사장의 딸 왕징웬(왕페이)은 일본 남자 타쿠(기무라 타쿠야)를 사랑하다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정신병원 신세까지 진다. 남자 차우는 바이 링(장쯔이)을 만나 사랑하고 늘 격렬한 정사를 나누지만 섹스 후에 그는 여자에게 꼭 화대를 준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화를 내다가 곁을 떠난다. 목적 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차우에게 호텔 주인의 딸 왕징웬은,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무협물보다는 정식의 소설을 쓰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2047호에 틀어 박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SF 판타지물인데 제목이 『2046』이다. 그 내용의 흐름이 바로 영화 ’2046’인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비교적 ‘깡그리’ 무시되는 시대를 코앞에 두고 살아가는 심정은 극히 괴롭고 고독할 것이다. 왕가위가‘중경삼림’을 만들고 ‘화양연화’와 ‘2046’을 만들었을 때가 그랬을 것이다. 1997년의 반환과 2046의 귀속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다. 곧 있을 새로운 5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그때의 왕가위와 비슷할 것이다. 존재 증명의 부정되거나 부인되고, 불안한 실존이 늘 흔들리는 일상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예술은 다다이즘에 빠질 것이다. 

 

왕가위의 마지막 연출작‘일대종사’에서 여주인공 궁이(장쯔이)는 엽문(양조위)과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인생에서 후회가 없다는 건 다 하는 얘기예요.” 그리고 언젠가 이런 얘기도 했다. “무예인에게는 3단계가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고 중생을 보라고요. 난 마지막 길을 가지 못하니 나 대신 당신이 가줘요.” 궁이는 지금 죽어 가는 중이다.

 

맞다. 지금의 우리 상황을 보니 궁이 처럼 후회할 일이 천지다. 무엇보다 자신도 보지 못했고 세상도 보지 못했다. 중생은 더욱더 보지 못했다. 지금 누군가 여기서, 영화를 찍으면 ‘중경삼림’ 이상의 걸작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과연 기뻐할 일일 것인가, 슬퍼할 일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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