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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이해와 용서의 강(江) 사이. 그리고 사랑

72. 헤어질 결심 - 박찬욱

 

박찬욱의 신작 ‘헤어질 결심’은 한 마디로 ‘영화 볼 결심’을 하게 만든다. 실로 수년 만에, 십수 년 만에 만나는 영화적인 영화, 영화다운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박찬욱은 이번에 ‘위대한 걸작’이란 표현보다는 ‘매우 뛰어난 역작’이란 표현이 걸맞은 영화 한 편을 내놨다. 그가 얼마나 장르적 규칙에 민감하고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그 허들을 넘어서는 도발적 작가 의식의 인물인가를 유감없이 토해 냈다.

 

박찬욱이 사람의 마음속 심연을 들여다보는 방식은 때론 악마적일 만큼 잔혹하다는 평가와 오해를 받았지만, 그건 그가 너무 예민하고 면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 현미경과 같은 정확한 심도에다가 뜻하지 않는 따뜻한 심성이 플러스됐다. 영화는 절절해지고 가슴이 아파졌지만 때론 달콤할 만큼 사랑스러운데다 그 마음속 우물이 더욱더 깊어졌다. 박찬욱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으며 여전히 새로운 영화적 항로를 찾으려 부심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입증해 낸다. 한국에서 봉준호가 칼 마르크스라면 박찬욱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아니 그 둘을 합친 에리히 프롬과 같다.

 

박찬욱은 어찌 보면 매우 기독교적 근본주의에 입각해 있는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참회를 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야만 구원과 용서를 받는다는 논리를 영화 속에 일관되게 심어 놓는다. 사람의 범죄는, 특히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물리적인 일이든 아니면 심리적인 것에 불과하든 늘, 이해는 되지만 용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고 이해는 안 가지만 용서는 할 수 있는 경우로 나뉘게 된다. 그 이해와 용서 사이의 강을 건너는 동안 사람이 겪는 감정은 대체로 사랑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그 사랑의 강 사이에서 헤매고 번민하는 남녀의 이야기이다. 눈물겹다. 박찬욱이 이렇게 지독한 러브 스토리를 찍을 수 있었다는 사실, 이런 정서의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에 대해 솔직히 말하면 경악스러울 만큼 반가워진다.

 

 

‘헤어질 결심’에는 두 가지 살인이 나온다. 두 번 다 똑같은 여자와 똑같은 형사가 얽힌다. 형사는 처음에 만만하게 당하지만, 두 번째에서 그는 그러지 않으며 여자가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에게 만만해지려고 노력한다. 예고편에도 나온 컷이어서 공개된 장면을 소개하면 이렇다.

 

두 번째 살인 현장에서 여자 송서래(탕웨이)를 만난 형사 해준(박해일)은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여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근데 사실은 그 이후의 다이얼로그들이 중요하다. 영화의 핵심적인 키워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한다. 그것도 중국어로. 통화로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남자는 그걸 번역기로도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어로 말해 달라고 한다. 여자의 중국어는 이런 내용이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을 떠났고 이제 내가 당신을 사랑하려 하니 당신이 나를 떠나네.” 여자는 흐느낀다. 이때부터 영화 전체가 흐느낀다.

 

사랑은 늘 엇갈릴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세상 이치이고 상대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건 이미 갖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반대로 상대를 놓아 주자 영원히 그를 가지게 된다는 진리를, 바로 그 신파의 진리를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맹렬한 속도로 웅변해 낸다.

 

여자는, 박찬욱의 모든 주인공들이 그렇듯이, 예컨대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그렇듯이, 사람을 죽였지만 죽이지 않았다. 죽이지 않으려 했지만 어쩌다 죽음에 이르게 했거나. 그녀의 범행은 우발적이지만 계획적이고, 설혹 계획을 세운 것이라 해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적어도 여자는 이런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사랑과 운명, 인생은 그 우연 속의 필연, 필연 속의 우연에서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우주의 삼라만상, 마음속의 격랑을 그려낼 수 있게 되고 또 깨닫게 되지만, 늘 그렇듯이 그건 이미 바다가 만조(滿潮)가 된 후의 일이다. 엇갈리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늘 미완성과 불완전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친다. 그렇게 사람들을 숙성시킨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는 박찬욱 스스로 적자(嫡子)로 생각하고 자신이 영화적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의 모든 코드들이 심어져 있다. 일단 형사 해준은 심각한 불면증 환자이다. 그래서 그는 잠복근무를 자처하는 일이 많다. 잠복근무는 늘 훔쳐보는 일이 태반이다. 관음증 아닌 관음증 환자이다. 망원경 렌즈 속의 상대는 늘 묵언이다. 형사 해준은 늘 상상으로, 머릿속의 시뮬레이션으로 모든 범행을 재구성해 낸다.

 

그건 마치 감독을 대신해서 영화 속 주인공이 영화를 직접 찍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일종의 거울 속의 거울이다. 그렇게 관객들은 영화 안에서 영화를 본다. 사실 속에 또 다른 사실이 숨어 있으며 진실은 늘 그렇게 가설처럼 만들어지거나 때론 조작될 수 있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불면증과 훔쳐보기 외에 히치콕의 장기는 현기증, 고소공포증이었다. 이 심리 장치는 이번 ‘헤어질 결심’에서는 처음 시체가 발견되는 장소에서 펼쳐진다. 실제와 가상을 뒤섞은 공간, 구미산 비금봉에서 내려다보게 찍은 부감 숏, 저 아래 기도수(유승목)의 시체가 누워 있다. 그 아찔한 느낌을 히치콕과 달리 박찬욱은,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영화 밖 관객들이 갖게끔 만든다. 해준이 부하 형사 수완(고경표)과 함께 자일에 매달려 봉우리 정상으로 오르는 장면은 고소공포증에 현기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게 만든다. 오싹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박찬욱이 가장 공들여 찍은 장면은 취조실에서의 모습이다. 형사와 여자는 마주 앉아 서로의 마음속을 탐색하기 바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저 다 하는 얘기일 뿐이다. 쓸데없다. 본질의 질문과 답이 아니다. 사건의 진실은 속마음에 있다는 것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두 사람을 투 숏으로 담아내되, 두 사람 너머의 취조실 유리창(이중 거울)에도 두 사람의 투 숏을 복제 시킨다. 두 사람은 한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도 존재한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또, 한 사람은 취조실 안에 있고 또 한 사람은 취조실 밖 모니터 속에서 잡히게 한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다른 곳에 머문다. 두 사람의 마음과 육체는 합쳐질 듯 합쳐지지 않는다.

 

이 취조실 장면의 기이한 기하학은 박찬욱이라는 인물이, 영화란 궁극적으로는 구도의 예술이며 대칭과 비대칭의 혼합적 양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장인(匠人)이고 장인이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다.

 

영화는 상상과 이데올로기, 작가적 천재성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이 기본기에 대해 충실해지려는 노력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보여 준다. 영화가 한 컷 한 컷, 한 장면 한 장면, 놓치고 버릴 것이 전혀 없다. 단 한 컷도 없다.

 

박찬욱은 이번에 진실로 ‘친절한 찬욱 씨’가 됐다. 그는 이전 작품에 대해서 사랑과 인간, 세상에 대해 줄곧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다. 사랑, 기껏 해봐야 불륜은, 세상을 평정시키거나 평화롭게 만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랑 따위가 뭘 할 수 있겠느냐는 태도였다. 그런데 그가 서서히 사랑을 믿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설령 사랑이 시작은 창대하고 끝은 미약하더라도 그나마 사랑만이 세상의 미동(微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눈물겹다. 박찬욱은 이번에 눈물겨운 작품을 만든 셈이다. 이번 영화 ‘헤어질 결심’은 그의 초기 전작 ‘복수는 나의 것’ 등과는 다른 선상에 서 있다. ‘스토커’나 ‘리틀 드러머 걸’, ‘아가씨’에 더 가깝게 서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후반 작품 가운데 최고봉이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받을 것이다. 박찬욱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화적 거인(巨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