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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아버지의 달력

 

 

글처럼 그리운 게 또 있을까. 그립고 그리워서 보물 같은 게 또 있을까. 보물은 박물관에만 있지 않아서, 달력에 적힌 글 몇 줄도 보물일 수 있다. 이를테면 농촌지도소에서 농민들에게 배포한 달력도 그중 하나다. 그림은 없고 숫자만 커다랗게 인쇄된 달력에는, 음력과 절기와 국경일이 적혀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날마다 그 달력에 기록을 하였다. 날짜가 인쇄된 네모난 칸 안에 ‘찹쌀 한 말(육손네)’, ‘비료 열 포대(화원댁)’, 같은 글귀를 써넣었는데, 빌린 것과 빌려준 것의 수량과 액수를 분명하게 밝혀 적었다. 빼곡하게 적힌 글귀가, 그러니까 잡다한 기록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음을 그녀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시골집 방에 걸린 달력이 그녀의 눈에 처음 밟혔다. 하마터면 불쏘시개로 태워지고 말았을 달력이었다. 아버지의 하루는 무엇으로 기록되었을까. 어떤 생각들이 아버지의 하루를 채웠을까. 달력을 들추다 그녀는 울고 말았다. 이빨 틈으로 흘러나오는 울음의 정체는 부끄러움과 죄송함이었다. 달력 앞장의 기록이 거래내역이라면 뒷장은 금전출납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매달 수입과 지출내역을 달력 뒷면에 적었다. 적을 때, 모아두어야 할 목표금액을 분명히 하였는데 그녀와 남동생의 대학등록금 총액과 일치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등록금을 내야 하는 날짜에는 어김없이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워야 보물인 것은 아니다. 예쁘고 매끄러운 문장이라야 소중한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남긴 아버지의 달력처럼, 삐뚤고 각진 글씨체라도 보물일 수 있다. 빼곡하게 기록한 근심과 걱정도 보물일 수 있다. 시와 소설과 수필과 희곡만 작품인 것은 아니다. 멀리 돌아볼 것도 없이 글을 쓰는 나부터 반성할 일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달력처럼 누군가에게 일말의 감동을 주기는 하였는지. 감동은 고사하고 여운이라도 남기기는 하였는지. 평생 가슴에 안고 살다가, 그립고 또 그리울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문장 한 줄 만들기는 하였는지. 글을 쓴답시고, 번지르르한 사탕발림으로 원고지나 축내고 있지는 않은지.

 

글처럼 그리운 게 또 있을까. 그립고 그리워서 보물 같은 게 또 있을까. 허구한 날 불러대는 사랑타령 말고. 철따라 피어나는 꽃타령 말고. 사람냄새 풀풀 나는 달력 같은 글. 누렇게 변색한 달력을 보물처럼 간직하는 그녀 닮은 글. 그립고 그리워서 자꾸만 읽고 싶은, 그런 글 어디 없을까. 눈만 뜨면 쏟아지는 용비어천가 머리글 말고. 팔겠다며 들이미는 광고글 말고. 들려주면 노래가 되고 듣고 있으면 메아리 되는, 그런 글 어디 없을까. 쏟아지는 말과 글의 홍수 속에서, 귀만 살아 동동 떠내려가는 세상에는 그리움도 시들고 말아. 이제는 사람냄새 마저 사고파는 세상이니. 달력 같은 글이 무슨 필요겠는가. 이 것 두 가지만 알면 그만인 것을.

 

-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