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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칼럼] 뒤늦은 한산(閑山) 감상기

 

 

1.

영화 《한산 : 용의 탄생》이 상영된 지 한 달 보름이 지났다. 영화 본 사람이 720만 명을 넘겼다. 관객 증가 속도가 완연 느려진 걸 보니 종영이 멀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이 글은 매우 뒤늦은 영화 감상기가 되리라.

 

김한민 감독의 최고 흥행작은 2015년 상영된 《명량 : 회오리바다를 향하여》. 1760만 명이 관람한 역대 관객 동원 1위다. ‘한산’은 그 후속편이다. 두 작품 모두 전투 장면은 막상막하다. CG가 크게 어색하지 않다. 왜적을 모조리 바다에 쓸어넣는 클라이맥스에서는 바라보는 심장이 터질 듯 벅차다. 하지만 전투를 제외한 스토리는 오히려 덤덤하고 평면적이다. 전작보다는 덜하지만 ‘국뽕끼’가 여전하다. 항왜(降倭)로 출연한 김성규의 석연치 않은 투항 동기, 택연과 김향기의 러브스토리도 뭔가 핀이 안 맞는다. 하지만 그런 작은 한계를 덮을 장점이 더 많은 영화다.

 

《한산 : 용의 출현》을 관람한 나의 핵심 포인트는 3가지였다. 첫째는 이순신의 캐릭터 설정이다. 전작 《명량》에서 최민식의 연기는 무서울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땅과 하늘을 격동시키는 장엄한 용기가 빛났다. 그렇지만 박해일이 연기한 이순신은 다르다. 어딘지 서늘한 문관의 이미지다. 목소리가 높지 않고 호령도 하지 않는다.

 

최민식의 연기가 스크린을 뚫고 튀어나올 듯 했다면, 새로운 이순신의 그것은 배경 속에 자연스레 녹아있다. 심지어 치열한 전투 장면 속에서조차 독보적 조명을 받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표정 속에 다른 무엇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드러난 겉모습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내공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다. (난중일기를 비롯해) 그가 남긴 고뇌의 기록을 보자면 이순신은 전생을 투척하여 한 길을 걸어간 성심(誠心)의 인물이었다. 전형적 문무 겸비 유형이었던 게다. 그러니 그의 본질은 《명량》보다 《한산》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2.

두 번째는 이순신의 대적자로 나온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다. 지금까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인물은 만용을 부리다가 박살이 나는 반푼이로 묘사된다. 이순신의 영웅적 능력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려는 장치였을 게다. 그러나 《한산》에서 와키자카(변요한 분)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나름 이순신의 전략을 꿰뚫어 만전의 준비를 한다. 부장 마나베가 어리석은 돌격을 하지 않았다면 승패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을지 모를 정도로 신중하게 묘사된다.

 

무인도에서 미역 먹으며 도망 다니다가 구사일생으로 일본에 돌아간 후, 그는 패배의 전 과정을 (상당히 수치스러울 것임에도 불구하고) 과장이나 왜곡 없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죽다 살아난 전투를 잊지 않기 위해 그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음력 7월 8일이 되면 미역을 먹는다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만 부각되면 서사가 생기를 잃는다. 안타고니스트(Antagonist)가 못잖은 개성을 발휘해야 스토리가 살아난다. 그 점에서 지금까지 나온 여느 이순신 영화보다 이번 작품은 주역들 사이 내적 긴장의 에너지가 팽팽하다.

 

3.

세 번째 포인트는 격돌하는 백 수십 척 배 안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 이야기다. 임진왜란 당시 모든 군선에서 돛은 보조적 수단이었다. 핵심 동력은 노 젓는 격군(格軍)들의 살아있는 육체였다. 당시 판옥선 한 척에는 총 125명이 승선했는데 거북선은 그보다 더 많은 150명이 탔다고 기록된다. 이 가운데 노 젓는 인원이 무려 90여명이었다.

 

이순신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봤다. 그런데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초인적 용기를 발휘한 이순신 이하 장수들. 그리고 생사를 걸고 전투 벌이는 수군들이었다.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에 참여했던 그 수많은 격군들. 오직 어깨와 팔의 힘으로 신명을 바쳐 배를 움직였던 승리의 원동력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밑바닥에 가뭇없이 잠겨버린 그들에 대해서 나는 깊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게다. 영화 《한산》에서 눈에 와서 박힌 것이 그 사람들이었다. “배를 돌려라! 좌현으로!”라는 명령에 맞춰 부풀어 오른 근육과 피처럼 뚝뚝 흐르는 땀. 그 모습이 가슴에 쑥 들어온 것이다.

 

임진왜란의 승리 자체가 그러했다. 울부짖는 백성 버리고 비오는 밤에 임진강을 건넌 비겁한 임금은 거지발싸개 취급도 말자. 이순신을 필두로 천하의 지략과 용기로 왜적을 무찌른 장수들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나라의 명운을 살려낸 뿌리는 따로 있었던 게다.

 

들판에서 고갯마루에서 칼에 베이고 조총에 맞아 죽어간 이름 없는 의병들. 한산 바다, 그 끓어오르는 열기와 배 밑바닥 어둠 속에서 목숨을 걸었던 격군들. 마치 유령을 보듯 화면 속에서 내가 스쳐 지났던, 역사의 필묵 위에 흔적조차 없는 수많은 이들이 이순신 못지않은 영웅이었던 게다.

 

관념으로야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이 나이에야 영화를 보며 그 진실의 핍진함을 창에 찔리듯 다시 깨닫는 나는 얼마나 늦된 자인가. 영화를 보고 난 후 오랫동안 내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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