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지기 전 추석이 왔다가는 게 다행스럽다. 숲에는 아직도 나뭇잎들이 나무의 상처를 가려주고 하늘을 적당히 숨기다가 드러내 주기도 한다. 철 늦게 우는 새소리는 ‘가을이 가요’ ‘가을이 가요’하고 낮은 소리의 리듬을 탄다. 산속 작은 벌레들의 연주는 땅으로 깔리다 그 소리 끝내 나무뿌리로 스며든다. ‘숲 속의 고요’에 청각이 맑아지는 시간이다.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인간관계보다 일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어느 정도 고립되어 지낼 때 창작의 방향으로 개성이 발달되기도 한다고 했다. 내가 강의하는 수필창작 반에 등록함으로써 인연을 맺은 L 씨라는 분과 도청 옆 ‘담’이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일주일 전부터 예약해야 된다는 그 집 분위기는 뭔가 담 안의 깊이와 가볍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다. L 씨는 내게 ‘보리굴비 정식’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처음 온 음식점이고 내게는 조금 부담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주문 같았으나 좋을 대로 하자고 했다.
성공은 형식과 물질 속에 있는 것 아니고 삶에 대한 이해와 긍정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성공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스스로 인내하며 불행하지 않는 뒤진 자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오늘 같이 과분한 분위기에서는 어려서부터 좀 더 넉넉하고 풍요한 가정에서 귀하게 성장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가슴속에 품게 된다. 보리굴비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조기를 사다 제사 지낸 뒤 가시를 발라내고 살만 떼어서 내 밥 수저 위에 얹어 먹여주시던 기억을 새롭게 했다. 따라서 그것이 오늘의 이 음식과 비슷한 것인가 하고 그냥 넘겼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의 손길 같이 L 선생이 고기를 발라주고 이것저것 음식 맛을 소개하면서 자기는 자주 온 곳이니 많이 드시라고 한다. 내 마음을 주물러 주듯, 아니 아기 달래듯 하며 많이 먹도록 하였다. 콩나물 국물은 차지 않게 적당히 냉기를 지니며 목 안으로 스며들면서 ‘이 맛이야!’하는 긍정의 느낌을 새롭게 했다. 나는 생각지 못한 보리굴비 정식에 행복감이 저절로 차오르는 것 같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랬더니 바로 L 선생 하는 말이다. “선생님은 지금 위로받을 때입니다.” 라고. 절대 사양하지 말고 위로받으며 힘내시고 가족을 잃은 상실감에서 속히 빠져나와야 한다는 듯 나를 어머니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렸을 적 겨울날 밖에서 얼음 치기 하고 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내 손을 두 손 모아 붙잡고서 ‘손이 얼음장이네’ 하시면서 입김으로 호! 호! 불며 녹여주셨다. 그런데 나는 오늘 이 순간 그때의 그 감정 속에서 어머니의 애정을 되새김하면서 속으로 눈물을 머금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이렇듯 내 영혼의 온도를 36⸰ C로 맞춰주며 위로해준 분이 어머니와 아내를 제외하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희생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늘 편안하다. 웃음기 머금은 호인형의 얼굴이다. 그러나 남의 삶을 이해하는 데는 건성일 수 있다. 슬픔이 슬픔을 만나면 서로에게 힘이 된다. 문학의 힘은 언어의 힘에서 나온다. ‘죽을 모퉁이가 있으면 살 모퉁이도 있다’고 했다, 나는 보리굴비 정식을 먹고 텅 빈 집으로 돌아와 가슴을 주물러주던 L 선생 언어의 힘을 생각하면서 홀로 눈물지었다. 자신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이 울 줄도 안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