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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의 광고로 세상 읽기] ⑨ 비누광고와 아메리칸 인디언 잔혹사

 

 

1.

사폴리오(Sapolio)는 1870년대부터 미국에서 판매를 시작하여 20세기 초까지 널리 팔린 비누였습니다. 출시 후에 팸플릿을 중심으로 판매를 이어가다가 1884년이 되면 본격 광고를 시작합니다. 아테머스 와드(Artemas Ward)라는 사람이 광고 책임자로 부임하고 나서부터였지요. 와드는 자신이 지휘해서 만든 광고를 지역 신문과 잡지에 대량으로 게재합니다. 그가 만든 독특하고 대담한 크리에이티브는 곧 전국적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지요. 특히 만화(cartoon) 풍의 일러스트레이션과 “만약에 (If...)"라는 가정법 카피를 결합시킨 일련의 시리즈 광고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문제는 광고 가운데 아래와 같은 사례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헤드라인은 “만약 인디언에게 사폴리오 사용을 가르쳤더라면, 그들은 훨씬 빨리 문명화되었을텐데...”입니다.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는 아메리칸 인디언. 그가 둘러쓴 망토 위에 “미국(U.S.)의 사폴리오를 쓰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적혀있습니다. 지는 해를 향해 말을 타고 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상당한 거북함을 느꼈습니다. 유머소구의 외피를 입었지만 그 바탕에 일그러진 시각을 품고 있는 광고이기 때문입니다. 당대 백인 주류계급의 인종차별적 편견이 노골적으로 깔려있다는 뜻입니다.

 

우선적으로 지적받아야 할 것은 '문명화시키다(civilize)'라는 개념입니다. 대상을 타자화(他者化)시키는 전형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이지요. ‘인디언(Indians)’은 기원전부터 남북아메리카에서 살아온 원주민을 보편적으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의 시작은 콜롬부스 등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던 시기에 유럽인들이 그 곳에 살던 원주민을 인도 사람으로 착각한 것에서 비롯되었지요.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s)이란 이름도 있습니다만 (1995년 실시된 국가 공식 여론 조사 결과) 오히려 당사자들이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s)이란 호칭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쨌든 광고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것은 아메리칸 인디언의 고유문화 수준이 백인과 비교해서 형편없이 떨어진다는 주장입니다. ‘문화’는 누구 것이라고 해서 우월하지도 않고 열등할 것도 없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그 점에서 인디언들이 비누로 옷과 몸을 씻어야 비로소 문명화될 수 있다는 시각 자체가 고약합니다. 19세기 후반 미국 백인들이 아메리칸 인디언들보다 더 위생을 중시하는 인종이라는 역사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비누, 샴푸, 향수, 구취제거제 등 1인당 청결용품 소비에서 압도적인 세계 1위를 자랑합니다. 특히 몸에서 나는 냄새에 병적인 거부감을 지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920년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균적 미국인들은 일주일에 고작 한번 정도 샤워를 했습니다. 옷을 자주 빨지도 않았구요.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서 냄새가 나니, 구취나 체취는 당연한 현상이라서 그것이 사회적 무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였지요.

 

사람들이 칫솔과 치약으로 이빨 닦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1919년)의 통계를 보면 칫솔과 치약 쓰는 미국 사람 비율이 고작 26퍼센트에 불과했던 겁니다. 대중목욕탕이 발달했던 고대 로마 시대와 비교할 때 중세와 근대의 유럽 백인들이 몸 씻는데 매우 게을렀음을 증명하는 문헌 자료는 숱합니다. 하도 몸을 안 씻어 생긴 악취를 숨기기 위해 향수 산업이 발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까요.

 

위의 광고가 집행된 시기는 1890년대입니다. 당시 백인계 미국인들 역시 보편적 비청결(非淸潔)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추정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를 통해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비문명적, 비위생적이라는 도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과연 그들이 백인에 비해 열등하고 불결한 인종이란 고정관념이 온당한 것일까요?

 

19세기 말엽이 어떤 시기였던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전역을 피로 물들인 원주민 학살이 막 커튼을 내린 때였습니다. 북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부족 단위로 산재하면서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을 기만, 계약 위반, 폭력적 추방을 통해 서부의 황막한 집단 거주지로 강제 이주시킨 국가적 범죄가 완료된 시점인 것이지요.

 

이 시기에 벌어진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Holocaust)에 비견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主流) 역사가들은 이 같은 비극을 애써 외면합니다. 예를 들어 폴 존슨(Johnson, 1997)은 『미국인의 역사(A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라는 책에서 다음처럼 말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인디언의 역사는 대개 인디언에게 연민을 품은 열렬한 지지자들에 의해 쓰여서 객관적인 진실을 흐리게 만들었다... 인디언은 교양을 지닌 소박한 원주민으로서 자연을 사랑하며 유토피아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 그러다가 유럽에서 건너온 잔혹하고 무자비한 침략자들에게 처참하게 짓밟힌 사람들 (이것이 20세기의 낭만적인 아메리칸 인디언 역사 연구자들의 견해였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원주민에 대한 대대적 공격과 살해를 부정하는 시각입니다.

 

 

2.

종교탄압을 피하려는 영국인 청교도(Pilgrim Fathers) 102명이 플리머스를 떠나 북아메리카 케이프카드(Cape Cod) 해안에 상륙한 것이 1620년 11월 11일. 길이 30 미터의 화물수송선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왔지요. 그 해 겨울 엄청난 혹한이 몰아칩니다. 상륙자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병에 걸리고 영양실조에 빠져 죽습니다.

 

그런데 봄이 오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영국 탐험대에서 영어를 배운 원주민 사모세트(Samoset)가 나타난 겁니다. 그가 다리를 놓아 근처에 살던 왐파노아그(Wampanoags) 부족이 공짜로 옥수수 씨앗을 주고 재배법까지 가르쳐주게 됩니다. 전멸의 위기에 처했던 그들이 살아난 것은 원주민들의 도움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가을이 되자 수확물과 야생 칠면조로 음식을 만들고 왐파노아그 족을 초대하여 잔치를 연 것이 바로 미국 추수감사절의 유례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청교도는 (살아남은) 53명, 아메리칸 인디언은 90명이었다고 합니다.

 

아래에 역사화가 진 레온 제롬 페리스(Jean Leon Gerome Ferris)의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그림 2). 제목은 ‘첫 번째 추수감사절’. 성장(盛裝)을 차려입은 필그림(Pilgrim)들이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음식을 나누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겨우 생존한 청교도들이 저런 멋들어진 복장을 할 리 만무했을 것임을 감안하고 봐주시기를).

 

이렇게 보자면 이후 수백 년 동안 자행된 백인들의 원주민 박해는 자기네 조상들에게 베푼 은덕을 철저히 배신한 행위였던 거지요. 무엇보다 미국 정부 스스로가 앞장서서 원주민과 맺은 토지계약 등을 사기와 협박을 통해 체계적으로 위반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선의와 믿음을 살육으로 되갚은 것이지요. 할리우드 영화를 중심으로 한껏 미화된 서부개척의 역사는 이처럼 원주민들의 무덤을 딛고 세워진 인류 문명사의 수치였던 셈입니다.


 

 

신대륙을 침략한 백인들이 저지른 집단학살(genocide)은 희생자 100만 명을 넘는 케이스만 해도 세 건이나 됩니다. 이를 시간 순으로 살펴보면, 첫 번째가 서인도제도에서 스페인 침략자들이 저지른 것(1492~1600)입니다. 두 번째 역시 스페인이 자행한 중남미 지역 잉카와 마야문명 말살(1498~1824)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미국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살해당한 사건(1620~1890)인 겁니다.

 

백인 약탈자들이 원주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기록이 전해집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스시코 피사로의 그것이지요.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에서 일개 시정잡배 출신의 피사로가 오합지졸 168명을 이끌고 잉카제국 황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는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1532년 11월 16일, 야비한 속임수를 통해 황제의 인신을 구속하고 난 다음 그는 이렇게 허풍을 치지요.

 

“여기 있는 이 기독교인들은 비록 그 수는 적지만 나는 이들과 더불어 그대의 왕국보다도 큰 왕국들을 정복하고 그대보다도 강력한 군주들을 무찔러 우리의 황제 폐하께 복속시켰소.... 우리의 임무는 선한 것이므로 하늘과 땅과 그 속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고 이는 그대가 하느님을 알고 지금까지의 "야만스럽고 사악한 삶”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심이오.“

 

“야만스럽고 사악한 삶“이란 표현의 밑줄은 제가 쳤습니다. 자기와 다른 문화, 인종, 가치관에 대한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편견이기 때문입니다. 피사로는 평생을 문맹으로 살면서 원주민 수 만 명을 학살한 무뢰한입니다. 그런 자가 단지 스스로가 백인이라는 ‘피부색의 권리’ 하나로 신의 이름을 빌린 서푼어치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는 겁니다.

 

재일 에세이스트 서경식이 쓴 『내 서재 속 고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까지 살았던 스페인 신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etolom de Las Casas)의 고백입니다. 라스카사스는 스페인에서 건너온 노예농장주였는데, 앞서 언급된 서인도제도 집단학살의 하수인이었지요.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신부가 된 것은 쿠바 섬 정복 당시 목격한 잔혹한 원주민 학살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 체험을 통해 식민지배를 반대하는 라스카사스에 대하여 어떤 신부가 이런 논리를 들이댑니다.

 

“기독교도들이 그 야만인들을 복종시켜 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자연법에 따르면, 이성이 결여된 사람들은 그들보다 인간적이고 사리분별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

 

유럽 침략자들이 원주민을 대하는 황당한 선민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인종차별과 노예제도를 정당화시키는 식민주의자들의 전형적 논리인 것이지요. 위에서 본 사폴리오 비누 광고가 집행된 것은 그로부터 400년 이상이 흐른 시점입니다. 하지만 차별과 배제를 존재의 생명줄로 삼는 침략자들의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광고는 선명히 보여줍니다.

 

 

3.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메리칸 인디언 제노사이드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 구체적으로 해보지요. 이들과 미국 정부의 충돌이 극단적으로 전개된 것은 1850년대부터 1890년대 초까지였습니다. 특히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군인들의 뒤처리가 문제였지요. 1877년 경에 이르러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됩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북군과 남군 출신의 수천 명이 (동부, 중부, 남부에서부터 원주민들이 강제 이주된)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으로 파견됩니다. 총 13회의 대형 군사작전과 천 회 이상의 소규모 전투가 전개됩니다. 역사학자 그랜딘(Grandin)의 『신화의 종말(The End of the Myth: From the Frontier to the Border Wall in the Mind of America)』에 따르면 박해 대상이 된 주요 종족은 사이엔족(Cheyenne), 라코타족(Lakota), 나바호족(Navaho), 아라파호(Arapaho)족, 수족(Sioux), 유트족(Ute), 바녹족(Bannock), 모독족(Modoc) 등이었습니다.

 

조직적 박해와 고향에서의 추방이 본격화되자 인디언들의 저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백인들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포장마차, 역마차, 고립된 목장에 대한 습격이 이뤄졌지요. 미 육군이 전투에 대규모로 개입한 후부터는 백인 병사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승패는 처음부터 뻔한 일이었지요. 무기의 절대적 부족과 군사작전 경험 미흡으로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됩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1890년 12월 29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일어난 참극이 가장 유명합니다. 미 육군 제7기병대의 소령 새뮤얼 휫사이드 지휘 하의 군인들이, 자기들이 체포하여 강제 이주시키던 수우족 350명 가운데 무려 300명을 일시에 죽인 겁니다. 운디드니는 미주리 주 포큐파인 크리크 인근의 샛강 유역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 희대의 집단학살이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베스트셀러의 제목이 되었지요.

 

 

 

작가 디 브라운은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사격이 시작되자 총소리는 귀를 멀게 할 정도였고 하늘은 화약 연기로 가득 찼다. 언 땅 위에 네 활개를 벌리고 숨넘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큰 발(Big Foot. 책에 등장하는 원주민 이름. 필자 주)’도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인디언과 미군들이 칼과 몽둥이와 권총을 돌려 잡고 격투를 벌였다. 무기가 없는 인디언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때 언덕 위에 도사리고 있던 기관총 네 정이 불을 뿜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유탄이 인디언들의 천막을 찢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벌집을 만들었다.”

 

아래 사진에 끔찍한 학살이 끝난 후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시신을 집단 매장하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불결과 무지를 조롱한 사폴리오 광고가 게재된 것은 이런 끔찍한 집단학살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런 어이없는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광고를 만든 아테머스 와드가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잘 몰랐다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인디언은 그저 유머러스한 아이디어 소재일 뿐, 핵심은 ‘비누의 세척능력’ 강조였다고 도리질 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봅시다. 추방과 절멸 대상이었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이 광고를 봤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설마 그 끔찍한 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조롱하기 위해 광고를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 믿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개인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대 미국 백인사회를 움켜쥔 편견과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이 크리에이티브 발상에 반영된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그 점에서 이 광고는, 서부개척의 미명 아래 원주민의 땅과 생명을 침략한 미국의 흑역사를 보여주는 고발장과 같은 것입니다. 단순한 물질적 약탈을 넘어 정신과 문화까지 짓밟는 내부 식민지배의 특징을 역설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종, 빈부격차, 성별(gender)에 따른 편견을 부추기고 때로는 그것을 강화해온 현대 광고의 과오를 상징하는 작품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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