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는 세상을 읽는 척도다. 공포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그 표현 수위, 통용되는 방식, 관객의 수용 태도 등등은 그 사회가 지금 어떤 문제의 지점을 관통해 내고 있는 지를 가늠케 한다.
그래서 한때는 공포영화의 그런 진지한 태도가 싫다며 팝콘형 공포영화, 곧 그냥 즐기는 오락 형 공포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스크림’이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이 그랬다.
그러나 공포영화는 곧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 본래적 역할, 곧 사회의 메신저 역할을 해내곤 한다. 영화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을 조금 좁게 치환시키면 공포영화를 보면 세상이 잘 들여다보인다가 된다.
감독부터 나오는 배우 대다수가 거의 ‘듣보잡’인 미국 영화 ‘스마일’이 쥐도 새도 모르게 10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홀연히 극장에서 사라진 것은 마치 공포영화 자체가 그렇듯, 소름 끼치는 일이다.
게다가 절대적 비수기라 불리는 기간에 벌어졌던 일이다. 영화 ‘스마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걸 보는 우리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스마일’은 극도의 편집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주인공 앞에서 깨진 유리로 목을 그어 자살했는데 그 순간 얼굴엔 기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 표정을 목격한 주인공이 어마어마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는 설정이다.
문제는 주인공 자신도 곧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집증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고 그런 증상이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결국 다들 목을 긋거나 총을 쏘거나 하는 등등 갖가지 방식으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짧게는 나흘, 길어 봤자 일주일 상관에 벌어진 것들이어서 주인공 로즈(소시 베이컨)도 스스로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 극도로 초조해 하기 시작한다.
로즈는 과연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혹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지는 않을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주인공 로즈와 함께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노이로제를 느끼기 시작한다.
영화 ‘스마일’은 명백히 코로나19의 전이와 전파, 그 전염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동시에 코로나19와는 다른 얘기를 다룬다.
‘스마일’은 코로나19에 대한 얘기인 척, 사실은 하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음을 영화 내내 서서히 드러낸다. 영화가 코로나19에서 코로나19가 아닌 얘기로 넘어가는 순간, 바로 그 시점에 ‘스마일’이 지닌 본질적 주제가 담겨 있다.
결국 주인공 로즈의 영화 속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로즈의 생사는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 바, 그건 이 영화를 만든 파커 핀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기 때문이고 또 그가 그러기로 한 것에는 관객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판단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무지 세상을 살아갈 쉬운 방법이 없음을 다들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영화 ‘스마일’은 한 번도 마음을 풀어 주지 않으며 오히려 공포의 강도를 점층적으로 높여 나간다. 이러한 서술방식이 이 누군지도 모르는 감독과 배우들 모두가 세상과 영화에 대해 꽤 두텁고 정교한 심미안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영화의 만듦새가 꽤나 좋다. 점점 미쳐 가는, 극도의 정신 분열에 시달리는 연기를 해 낸 소시 베이컨의 연기가 눈에 띈다. 당연히 그런 연기를 뽑아낸 연출의 힘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당분간 사람들이 짓는 미소나 웃음이, 그 속에 결코 간단치 않은 진실을 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웃음이 무서운 세상, 미소를 재해석해야 하는 세상은 평화롭고 아늑하며 행복한 무엇과는 담을 쌓은 상태일 수밖에 없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비교적 급속한 속도로 전염되는 바이러스의 공포는 사실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무서움보다는 그것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심리적 위축, 그 확산이 더 큰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바이러스로 인해 시작된 공포는 사람들 간의 불신, 정치 사회적 차별과 탄압, 경제의 양극화로 인한 소통의 단절들을 양산해 낸다.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람들을 극도로 고립시켰는데 영화 속 주인공 로즈의 환자들(그녀는 신경정신과 의사로, 스스로가 상담의이기도 하다)은 대다수 역시 혼자서 이상한 증세에 시달린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보고 느끼며 결국 그녀나 그도 죽고 자신도 죽게 된다고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로즈는 전 애인 조엘(카엘 케터)과의 관계 이후 안정적인 남자 트레버(제시 어셔)와 행복한 생활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지만, 트레버는 곧 여자의 기이한 행동들에 질려 하기 시작한다. 로즈의 고립과 고독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무도 그녀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로즈는 어릴 때 자신 앞에서 죽어 간 엄마에 대한 기억을 소환시키기까지 하는데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건 다른 귀신이 아니라 바로 엄마 귀신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웠던 사람. 무조건적인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그 관계의 파탄은 이미 근원적이었고 모든 트라우마와 공포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무서운 형상으로 로즈에게 나타나 왜 ‘그때’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힐난한다. 결국 로즈의 심리 밑바닥에 있는 공포, 그녀가 자신 앞에서 목을 그은 여자의 모습을 보고 난 후 겪게 된 트라우마의 정체는 죽어가는 엄마를(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공포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그건 최근 몇 년간의 세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의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타인의 고통, 타인의 죽음보다는 그저 나만 살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적 생존 의식과 그 유전자를 확인시킨 공포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이제 극도로 고립된 상태에서 외롭게 죽어갈 것이다. 자신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그런 심리적 증상을 치유할 방법을 찾아내지도 못할 것이다. 바이러스 치료제가 나온다 한들 그런 세상에 대한 치유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스마일’이 다루고자 하는 공포의 정체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은 치료될 수 없다는 것, 이제 우리는 치유의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줄곧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쇼크에 이르게 한다. 그 괴상망측한 존재, 심지어 미소를 띠고 있는 그 기묘한 형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한다.
그 존재는 당신이 지금 일하고 있는 데스크나 의자 옆에 붙어 있거나 천정 위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고 심지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는 식이다.
영화 ‘스마일’은, 공포영화란 사람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장면이 세 개쯤 있어야 하고, 끔찍하게 자해하거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세 개쯤은 있어야 하며, 사람들의 시체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돼 있는 장면이 세 개쯤 있고, 너무 징그러워서 욕지기가 나오는 장면이 세 개쯤은 있어야 한다는 그 원칙 아닌 원칙에 충실한 영화다.
결론은, ‘스마일’은 꽤 무서운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스마일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왜 자신을 죽이기 전에 미소를 띠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이제야 마음의 짐, 가슴속 공포를 벗어나게 됐다는 식의 안도감 같은 것 때문일까. 아니면 ‘너도 나처럼 될 것이다’는 식의 저열한 심리의 소산일까.
분명한 것은 그 미소가 매우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극장 문을 열고 나온 후에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 차창 속에는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이 비칠 수도 있겠다. 진짜의 나는 전혀 웃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의식 저 밑바닥에는 어떤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가. 길가 골목에서 어처구니없이 죽은 156명의 젊은 아이들을 구해 내지 못했다는 것? 그 죄책감이 나의 이기적 생존 유전자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
영화는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내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음속 심연 저 한가운데에 있는 괴물을 꺼내게 만드는 세상이다. 영화 ‘스마일’은 그 깊은 우물의 공포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