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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첫눈을 기다리며

 

 

첫눈(小雪)은 청첩장이에요. 겨울이 보내온 언약이기도 하고요. 가을빛에 시든 것들의 머리카락을 하얗게 물들이겠다는 다짐이라고나 할까요. 언약이든 다짐이든 속내를 들춰 보면 거절할 수 없음을 알게 되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러한데 계절과 계절이 주고받은 약속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간다고 해서 붙들 수 있는 가을이 어디 있으며, 온다고 해서 등 돌릴 수 있는 겨울이 어디 있겠어요. 사람에게도 세상에게도 시절에게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있어요. 이를테면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도 그런 셈이지요. 지어낸 이야기의 그 소설(小說)이 아니니까 흘려듣진 마세요. 좋든 싫든 첫눈은 오고야 마는 거니까요.

 

첫눈(小雪)은 밤 여덟 시에요.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라면, 밤 여덟 시는 스무 번째 시간에 속해요. 무슨 소리냐고요? 일 년을 스물여섯 개의 절기로 나누었을 때, 스무 번째 절기가 소설(小雪)이라고 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나요? 그리 보면 밤과 겨울은 닮았어요. 어둡고 춥고 쓸쓸해요. 날짜로 환산해 보니까 11월 22일이더군요. 절기상 소설(小雪)에 해당하는 날짜 말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지나온 11월 22일을 돌이켜 보면 유독 찬바람이 불었어요. 1997년 11월 22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어요. 기억나시죠? 외환위기와 IMF. 그랬던 김영삼 대통령이 죽은 날 또한 2015년 11월 22일이었으니, 참 아이러니해요.

 

첫눈(小雪)은 굶주림인지도 몰라요. 결실을 맺지 못해 허기진 것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하얀 밥알 같은 것 말이지요. 사람의 주린 배는 알곡이 채우지만 세상에 뚫린 구멍은 첫눈이 메우잖아요. 첫눈은 굶주린 것들의 배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길 같아요. 그래서 첫눈은 시리기보다 따뜻해요. 첫눈 내리는 날이면, 까닭도 없이 설레는 가슴도 그래서일 거예요. 눈밭을 뛰노는 강아지의 꼬리처럼 말이지요. 당신에게는 그런 기억 없나요. 손가락을 걸었든 말았든,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하였던 약속. 다가오지 않은 날을 걸고 하늘에 다짐한 그 약속은 지켜졌는지 궁금해요. 약속이기 보다 소망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이뤄졌는지 알고 싶어요.

 

첫눈(小雪)은 기다림이에요. 온다는 보장이 없어서 무지개 같은 기다림이랄까요. 무지개는 한 가지 색깔로 이뤄지지 않아요. 일곱 색깔이 공존할 수 없는 무지개는 무지개일 수 없어요. 사람 사는 세상도 그렇잖아요. 피부가 다르고, 말과 글이 다르고, 옷과 집과 차와 음식이 달라도 함께 살아요. 달라도 사는 데는 문제없어요. 아니, 문제가 없어야 해요.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모두가 꿈꾸는 첫눈 오는 날이 있으니까요. 그래요. 맞아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첫눈도 있어요.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고 부산과 목포에도 첫눈이 내리란 법은 없어요. 딛고 사는 땅과 현실과 처지에 따라 오기도 하고 오지 않기도 하는 것이 첫눈이니까요.

 

첫눈(小雪)은 결핍의 온도에요. 켜켜이 가슴에 쌓인 결핍의 종류에 따라 기다리는 첫눈의 무늬가 달라요. 첫눈 오는 날의 온도가 달라요. 부리는 자와 일하는 자의 첫눈이 다르고, 감추는 자와 나누는 자의 첫눈이 달라요. 달라도 한참 다른 첫눈이에요. 그렇다고 기다림을 포기하지는 말기로 해요. 눈 한 번 내리지 않는 사막에도 꽃이 피잖아요. 그러니 기다리기로 해요. 창밖에 뿌려진 첫눈이 당신의 가슴에 쏟아지지 않아도 실망하진 말아요. 당신의 첫눈이 모두의 첫눈과 같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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