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된 땅 한반도에 사는 우리 민족은 서럽다. 78년이라는 너무나 긴 세월 동안 이산가족들이 서로 만나지도, 방문할 수도, 서신도 주고 받을 수 없는, 전 세계의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남북당국자 회담 끝에 나온 합의 이후 극소수 인원만이 몇차례 상호방문을 했을 뿐 대부분의 이산가족들은 버려진 채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현재 북한과의 접촉은 철저히 차단돼 있다. 정부의 허락 없이는 서신 교환이나 만남이 법으로 금지돼 있다. 국가보안법(보안법)이 엄존하는 현 상황에서는 통신-회합 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대만과 중국도 2008년 ‘3통 조처’로 이산가족이 본토 방문과 서신 교환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보안법은 1948년 과거 독립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보안법을 그대로 답습해 제정된 법이다.
이 법은 숱한 남용 사례를 남겼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이승만 정부 아래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이승만의 최대 정적 조봉암마저 이 법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1심 무죄 선고를 받고도 1958년 2심과 대법원의 유죄 판결을 거쳐 죽임을 당했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사건)도 똑같은 사례이다. 무고한 인사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이듬해 4월8일은 지금껏 ‘사법살인의 날’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은 앞서 1964년에 대학생들과 함께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을 뿐인데, 배후인 ‘인혁당 간첩’(이른바 1차사건)으로 몰려 곤욕을 치렀던 현직교사들이었다. 당시 담당검사 3명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장기간 고문수사를 했던 사실이 밝혀지자 “양심상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를 거부하기도 했다.
악몽이 1974년에 재연된 셈이다. 이들 인사는 10월 유신 이후 저항운동을 벌인 대학생들의 배후로 또 다시 조작된 것이다.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한 사람은 그 후유증으로 옥사했고 다른 2명은 고문 흔적을 없애기 위해 시신이 화장 처리됐다. 억울한 누명은 재심 끝에 1차 사건 관련자 13명 전원이 2013년 무죄 또는 공소 기각조처로, 2차 8명 모두에게는 2007년 무죄가 선고됨으로써 풀렸다. 민주화 또는 통일 운동가뿐 아니라 납북 어부들을 비롯한 무고한 시민들에게도 보안법은 무차별로 화를 입혔다.
보안법은 미국 국무부 장관이 1993년 인권보고서에서 밝혔듯이 남용될 우려가 큰 법이다. 국제사면위원회도 “적용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유엔이 정한 표현의 자유에 관한 규약을 위반하므로 긴급히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4년에는 우리나라 국가인권위원회도 보안법 폐지를 공식 권고한 바 있다.
보안법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헌법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헌법에 반하는 법률이다. 이 법이 멀쩡히 살아 있는 한 이 땅의 민주주의는 온전해지기 어렵다. 남북 교류나 협력을 통한 민족의 공존과 번영도 불가능하다. 민족의 평화 만들기는 보안법 개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이산가족의 만남부터 제한 없이 허용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분단을 극복하는 첫 걸음은 보안법 개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