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 줄 알았던 부잣집 종손 정해권 인천시의원(59, 국힘, 연수구 옥련2‧연수1‧청학동)은 외환위기 2년만인 1999년 운영하던 사업체 부도를 맞는다.
부모님 도움으로 시작한 사업이었고 씀씀이가 헤프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옥외광고물 사업이다 보니 기업들이 광고비용을 줄인 탓이 컸다.
이후 1년 반을 허송세월하다 2001년 도망치듯 가족과 함께 삶의 터전을 태국으로 옮겼다. 빈손이었던 그에게 현지 한인들이 관광가이드를 권유했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런 그를 일깨운 건 아내였다. 태국말도 못하는 아내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미용실에 나가 일을 시작했다.
정 의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며 “결국 관광가이드를 시작하고 여행사를 차려 5년만에 방콕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회사로 키워냈다”고 말했다.
여행사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 가이드를 맡게 된 고객이 60대 부부였는데, 남편이 호텔에서 수영하다 사망했다. 그의 잘못은 없었지만 업체 신뢰도 하락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신을 수습하러 온 사망자 아들과 친구들이 그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충북 청주의 한국청년회의소(JC)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이었다.
정 의원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더라”며 “JC 후배들이다 보니 나를 믿어줬고, 나 역시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 해 큰 타격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를 JC와 해병대로 꼽는다.
정 의원은 1987년 JC에 가입해 1995년 인천지구 회장과 한국JC 상임부회장을 지냈다. 이때 각종 국제회의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고 정치인으로서의 꿈도 키웠다.
태국에서 상선 등 대형선박에 부식을 공급하는 사업에도 진출했는데, 해병대와의 인연이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병 504기로 만기전역한 뒤 꾸준히 해병전우회 활동을 해왔다.
2000년대 중반 우리 해군‧해병대가 다국적 연합훈련인 코브라골드 훈련을 위해 태국을 찾았는데, 이때 정 의원이 해병대에 통역 등의 도움을 줬고 이게 또 하나의 사업이 됐다.
그는 “JC와 해병대를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있지만, 나에겐 모두 큰 경험이자 자산”이라며 “그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정 의원 집안은 아버지부터 자녀들까지 3대가 해병대를 나와 사령관에게 병역 명문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의 꿈은 인천 토박이로서 인천을 잘 사는 도시, 애향심이 넘치는 도시로 만드는 것이다. 중구 신포동에서 태어나 동구·미추홀구·연수구에서 살아온 그에겐 인천의 모든 곳이 소중하다.
정 의원은 “인천에서 돈을 번 기업이나 사람들은 대부분 떠난다. 애향심이 없는, 주인 없는 도시 같다”며 “시민들이 잘 살고 애향심이 넘쳐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 10년만에 귀국해 정치를 하는 것도 그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실패를 겪으면서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웠다. 겪어보기 전의 나라면 할 수 없던 일”이라며 “지역을 위해 일하는, 흔들리지 않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했다.
[ 경기신문 / 인천 = 최태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