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잊은 사람 중에 신동 이갑이 있다. 1877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난 이갑은 겨우 열두 살에 진사시험에 급제했다. 나이를 세 살 올려서 응시한 결과였다. 집안과 이웃들에게 크나큰 경사였다.
그러나 이 경사가 멸문의 화를 불러왔다. 당시 평안감사 민영준은 이갑이 나이를 속여 진사시험에 응시했다는 이유로 이갑의 아버지를 끌고 가 갖은 고문을 했다. 극에 달한 민비 일족의 위세를 등에 업은 민영준은 이갑 집안의 농토 40정과 재산을 빼앗았다. 고문후유증과 화병에 시달리던 이갑의 아버지는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며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패한 세상을 바로잡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복수심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이갑은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898년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육사 15기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동기생들은 대부분 19세 전후였는데, 그는 26세였다. 그럼에도 그는 휴식시간에도 총검술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육사 15기 동기생 중에는 한국인도 7명이 더 있었다. 한국인 동기들은 이갑을 중심으로 뭉쳤고, 스스로 ‘8형제배’라고 부르며 결속을 다졌다. 같은 평안도 출신으로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참모총장과 군무총장을 역임한 유동열과는 특별히 가까웠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육사 15기 ‘8형제배’는 하세가와가 이끄는 근위사단과 함께 진남포를 거쳐 평양에 입성했다. 이갑에게 일본과 러시아는 다르지 않은 외세일 뿐이었다. 평안도 고향땅을 거쳐 만주 전선에 참전했던 이갑이 서울로 귀환하자 고종은 그를 무관학교 교관으로 발령했다.
무관학교는 일본육사 15기 8형제배의 집결지가 되었다. 무관학교의 실세인 노백린과 어담도 일본육사 11기였다. 러일전쟁에서 최고의 공훈을 세운 하세가와가 한국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은 더 강해졌다. 이갑은 정장군복을 차려입고 교동에 있는 민영준의 집으로 찾아가 빼앗아간 전답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민영준은 전답을 빼앗은 사실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욕까지 했다.
“서북놈들은 할 수 없군. 군복을 벗겨야 겠어.”
이갑은 허리에 찬 군도를 빼들고 호통쳤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은 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소. 대감의 배에 이 칼이 들어가지 않을 줄 아오?”
이갑의 기세에 놀라 도망친 민영준은 사람을 보내 이갑에게 요구사항을 물었다. 살기등등한 이갑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갑은 대한제국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 절정이었고, 그의 옆에는 ‘8형제배’가 있었다.
이갑은 강탈한 토지를 반환하고 빼앗아간 곡물대금 전액에 이자를 붙여 상환할 것을 민영준에게 요구했다. 또한 그동안 국가와 민족에게 저지른 악행을 속죄하기 위해 육영사업을 펼칠 것을 용서의 조건으로 달았다.
민영준은 지체없이 이갑의 아버지에게 빼앗았던 전답을 모두 반환하고 15만원을 배상했다. 하지만 이갑은 민영준에게 돌려받은 거액을 교육사업과 동지들을 돌보는데 썼다. 원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한 것이 그가 자신을 위해 사용한 전부였다. 원동의 집도 동지들을 재우고 대사를 도모하기 위한 공적 공간에 가까웠다.
이갑의 기개와 사람됨을 확인한 민영준도 이갑을 인정하고 휘문학교를 열어 민족교육에 기여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 일본육사 출신들은 출세 길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이갑은 망명길에 올랐고, 연해주에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투쟁의 한 길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그가 일본육사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강성한 대한의 군대를 만들어 조국을 지키려 한 것이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