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마트료시카는 당당해“는 필자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오늘은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에서 사소한 발견을 해 보자.
한때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그 나라의 민속 인형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디자인대학에서 강의를 했을 때 교환학생으로 온 모스크바 출판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우리 집에 방문하여 모아놓은 세계 인형들을 보고 재미있어 했다. 그중 한 학생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마트료시카는 다산과 다복, 부유함과 행운을 가져오는 인형으로 알려져 있다.
마트료시카는 큰 인형 속에 더 작은 인형이, 그 속에는 더 작은 인형이 들어 있어서 모두 꺼내면 여러 개의 인형들을 점점 작은 크기로 줄을 세울 수 있다. 아주 단순하지만 인형들을 꺼내어 줄세우는 것은 심심할 때 나에게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현대인의 정신적 불안
이 단순한 놀이를 반복하다보니 이 인형에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되었다.
가장 바깥의 나는 겉으로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살고있지만 내 속에는 또다른 내가 상처받고 절망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어서 내 속의 나를 만나기 두려워하고 부정하고 싶어한다.
또는 현재의 나는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하지만 내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나는 맑고 밝고 건강하여 내 속의 나를 만나는 것이 현재의 나를 치유하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맨몸으로 태어나서 아주 약하고 작은 나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월의 옷을 한 겹씩 끼어입으면서 점점 자라고 늙어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어린 나를 발견하지 못하다가 큰 일을 겪고나면 자신의 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하라
그 아이를 발견하고 따뜻이 품어주면 깨닫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더 작고 여린 나를 잃지 않고 품어가는 것임을.
따뜻하게 품고 있다가 어느 날, / 순하고 어린 아기였던 내 웃음이 필요할 때, / 마지막 잎새에 눈물짓는 열세 살의 눈빛이 필요할 때, / 당차게 도전하던 스무 살의 심장이 필요할 때, / 어려움에도 벌떡 일어나는 서른 살의 의지가 필요할 때, / 함께 웃고 울며 타인을 품에 안을 줄 아는 마흔 살의 아량이 필요할 때, / 기꺼이 그때의 나를 꺼내 지금의 나에게 보여주며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였다.
어느 시절이든 후회도 있고 상처도 있었지만 최선의 삶이었고 진심이었던 것은 조금 더 큰 내가 더 어린 나의 그 추억과 기억을 아름답게 보호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내 속의 나를 지금도 나 몰라라 하면 어떤 내가 어떤 아픔으로 웅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내 속의 수많은 나들을 꺼내어 보듬어주면 예전의 상처는 싸매지면서 추억으로 남고, 예전의 자랑은 나를 세우는 자존감으로 남는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나의 현재 뿐만 아니라 나의 과거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그때 나의 미래가 나의 현재를 책임져 줄 것이다.
마트료시카에서 찾은 내 속의 수많은 나의 발견은 비록 사소하지만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내 속의 모든 나들이 나를 사랑하고 축복하면 험한 세상 속에서도 나는 좀더 당당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