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목 차원에서 화투 놀이나 운동 경기를 하다가 사소한 걸로 다툼이 일어나 마침내 큰 싸움에 이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대개는 그 게임의 규칙을 두고 일어나는 다툼이다. 그런데 이런 장면에서 죽기 살기로 나서서 우기는 사람이 있다. 꼭 있다.
예컨대, 축구 경기에서 자살골이 터졌는데, 자살골은 골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는 제법 논리적인 주장인 양, 골은 반드시 상대가 공격해서 상대 선수가 넣는 골만이 정정당당하다고 우긴다. 그에게 FIFA(국제축구연맹) 규정을 들이밀며 자살골도 엄연한 골이라며 다그쳐 보아도 그는 막무가내 우긴다. 그건 FIFA 규정이 잘못된 것이란다. 독선의 극치를 본다고나 할까. 그의 우기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그에게 너는 무슨 근거로 자살골은 골이 아니라고 우기는 거냐? 근거를 대라고 다그친다. 그는 이게 무슨 근거가 필요한 거냐고 버틴다. 근거 없는 규칙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되 몰아붙이면 그는 조금도 밀리지 않으면서, 마침내 우기기의 끝장 끝판을 보여 준다.
“야, 우리 동네에서는 진작부터 자살골은 골로 치지 않는 축구를 해 오고 있단 말아야. 뭘 좀 알고 이야기하란 말이야!”
‘우기다’의 사전적인 뜻은 ‘억지를 부리어 어떤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다.’로 되어 있다. 그냥 고집스럽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억지를 부리어’ 내세운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 ‘억지’란 무엇인가. 잘 안될 일을 무리하게 기어이 해내려는 고집이 바로 억지이다. 그러니까 우기는 행위 속에는 ‘억지’, ‘고집’ ‘잘 안 될 일(마땅하지 않은 일)’, ‘무리하게’, ‘기어이(계속해서)’ 등의 부정적인 의미 자질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바르고 마땅한 일을 우기지는 않는다. 마땅치 않은 일이 우기기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우기는 행위를 다반사로 하는 사람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진단은 금방 공감이 간다.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우기지 않는다. 아는 척하는 사람이 우긴다. 그래서 ‘제대로 아는 사람’보다 ‘아는 척하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나온다. 옛말에도 서울 가 본 사람과 서울 안 가 본 사람이 남대문을 두고 싸우는데, 결국은 서울 안 가 본 사람이, ‘남대문’이라 써 붙인 걸 보았다고 우겨서 이긴다고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으면 거기서부터 우기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기는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이 우긴다. ‘이기다’와 ‘우기다’를 동의어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기는 자의 심리는 대체로 이러하다.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걸 본인도 속으로는 알면서도 그 잘못을 잘못 아니라고 계속 주장하는 것인데, 이는 일종의 유아 심리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어떤 열등감이나 강박에 시달릴 때 우기게 된다는 것이다. 약한 내면을 은폐하기 위해서 강한 척해 보이는 몸짓으로 볼 수도 있다. 똑같은 잘못을 나도 범하고 남도 범했는데, 내 잘못은 안 보고 남의 잘못만 물고 늘어지는, 이른바 ‘내로남불’의 행태도 ‘우기다’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계속 우기다 보면 자신조차도 속이게 된다는 점이다.
문제는 우기다가 개인의 심리 차원에서만 횡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우기는 사회’가 되었다는 데에 있다. ‘우기는 놈이 이기는 놈’이라는 굳게 믿는 사회가 된 듯하다. 병든 사회이다. 바른 판단을 내려야 할 사법 시스템도 마냥 느리고 지연되기만 하여, 우기는 쪽을 키운다. 음주 운전한 인기 연예인도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가능한 버티고 우긴다.
정치인들은 자기가 범한 잘못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 잘못을 상대방이 조작한 것이라고 우긴다. 진영 논리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정당의 대변인들에게 공격 능력을 주문하면서 은연중에 우기는 역량을 주문한다. 정파 내의 열성 팬덤은 우기기를 강화하기 위한 외곽 조직인 듯하다. ‘우기는 사회’로 기울어지는 이 사회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