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2 (금)

  • 구름조금동두천 22.5℃
  • 구름조금강릉 25.3℃
  • 박무서울 22.4℃
  • 박무대전 22.6℃
  • 박무대구 23.1℃
  • 박무울산 22.9℃
  • 흐림광주 23.1℃
  • 박무부산 22.8℃
  • 구름많음고창 22.4℃
  • 구름많음제주 23.0℃
  • 맑음강화 21.5℃
  • 흐림보은 22.5℃
  • 흐림금산 21.8℃
  • 맑음강진군 22.5℃
  • 맑음경주시 21.3℃
  • 구름많음거제 22.4℃
기상청 제공

[고향갑의 난독일기] 적요(寂寥)와 저기요

 

툭하면 코피를 흘리던 녀석이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녀석은 밥보다 약을 자주 먹었다. 밥보다 약을 사랑한 까닭으로 녀석은 작고 말랐었다. 글쎄, 그림자보다 가느다란 소녀가 있었다면 믿어주실런가. 그런 녀석이 애지중지하던 건 청바지였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상관없이 녀석은 늘 청바지를 입고 살았다. 청바지만큼이나 도드라지는 특징은 단발머리와 까무잡잡한 얼굴이었다.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많았지만, 녀석의 얼굴에 햇살이 드리우기라도 하는 날이면, 가지런한 치아에서 묻어나오는 하얀 미소가 어찌나 예쁜지 숨이 막혔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그러니까 작고 깡마른 단발머리 소녀는 언제부턴가 눈엣가시가 되어 있었다. 눈엣가시는 보지 않아도 거슬리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눈엣가시다.

 

마음만 먹으면, 군인이 제 손으로 계급장을 뜯어내고 대통령이 되던 시절이었다. 미쳐 돌아가는 시절이다 보니, 학생 또한 강의실보다 거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더러는 강의실을 찾은 학생에게 “정신이 있는 자들인가.” 호통치며 거리로 내쫓던 교수도 있었다. 지지리 복도 없는 나는 그런 교수의 수업은 들어 보지도 못하고, 학점만 선동열 방어율(0.75)에 육박했다. 경이롭기 그지없는 내 학점은 All F에 1학점짜리 한 과목만 D zero를 받으면서 완성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엣가시였던 녀석은 툭 하면 집회에 참석했다. 지금처럼 방석 깔고 앉아 촛불로 연대하는 아름다운 집회가 아니었다. 유모차 부대가 경찰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는 낭만 가득한 시위 현장도 아니었다.

 

최루탄은 화염병보다 빨랐고, 백골단은 돌멩이보다 더 빨랐다. 빨라도 너무 빠른 투석전의 물결 속에서 눈엣가시는 책 대신 망치가 든 배낭을 메고 거리를 활보했다. 눈엣가시가 맡은 임무는 보도블록을 망치로 잘게 쪼개서 전투경찰과 대치한 선두 대열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눈엣가시가 속한 그룹을 ‘보급조’ 또는 ‘망치부대’라고 불렀다. 명칭이야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녀석은 조금만 빨리 뛰어도 금세 입술이 파래졌다. 녀석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용케도 녀석은 살아남았다. 체포되거나 연행된 적도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녀석의 모습은 거기까지가 끝이다. 나는 2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중퇴했다.

 

그렇게 끝나버린 녀석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뜻밖이었다. 삼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녀석의 눈망울을 다시 보게 된 곳은 문래동 철공소 골목에 자리 잡은 아트필드(ARTFIELD)다. ‘藝香萬里’, 전시에 참여한 작가 가운데는 이적요 선생도 있다. 나는 그림에 까막눈이다. 하지만 이적요 선생은 안다. 몇 해 전이었을까. 선생을 뵈러 전주에 간 적이 있다. 작품을 보며 눈 호강을 하고, 작업실에 들러 술과 커피도 마셨다. 보고 먹고 마시는 동안 든 생각은 그랬다. 진심이구나. 순정파구나. 그래서 적요(寂寥)라는 이름도 쓰게 되었겠지. 혜규라고 하였던가. 선생이 즐겨 그린다는 딸아이의 초상. 그 아이의 눈망울을 쏙 빼닮은 눈엣가시 그 녀석의 초상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문래아트필드, 바로 거기에.

 

적요(寂寥)라는 이름표를 달고, 캔버스에 담아낸 혜규의 눈망울에서. 쓸쓸하고 적막한 적요의 시공간 너머에서. 저기요 슬쩍 손을 들며 녀석이 웃어 보였다. 삼십여 년을 훌쩍 뛰어넘은 지금도, 눈엣가시 그 녀석의 하얀 미소는 숨이 막히게 예뻤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녀석의 딸아이도 저렇게 하얀 미소를 가졌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누구에게나 눈엣가시 같았던 녀석 하나쯤 있었으리라. 그 녀석이 소년이든 소녀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가슴을 더듬어 생각해 보자. 그 녀석의 미소가 어떤 색깔이었는지. 갓 볶아낸 커피 냄새였는지, 마른 운동장에 흩어지던 소낙비 소리였는지. 그래도 끝내 가물거리거든 문래동 아트필드로 가자. 거기에 ‘藝香萬里’가 있고, ‘이적요’ 선생의 작품과 ‘저기요’가 있으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