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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박사의 맛있는 인천 섬 이야기] ㉖민어와 태풍

  • 등록 2024.08.04 11:57:04
  • 14면

 

민어는 농어목 민어과 물고기다. 민어는 몸 빛깔은 회색을 띤 흑색으로 등쪽부분이 짙으며, 배부분은 연한 편이다.

 

민어는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각각인데 서울과 인천에서는 네 뼘 이상을 ‘민어’, 세 뼘 이상은 ‘상민어’, 세 뼘 내외를 ‘어스레기’, 두 뼘은 ‘가리’, 그미만은 ‘보굴치’라 했다.

 

우리나라 민어어장은 완도, 진도, 칠산, 격음열도, 인천, 진남포, 연평도 주변, 압록강 등이다(한국수산지, 한국수산지 제1권, 1910년).

 

민어는 제주도 근해에 있다가 산란기가 되면 서해 쪽으로 올라오는데 보통 6월에서 8월 사이에 민어 조업을 한다.

 

몰려다니면서 무리를 이루는데 바닷속에 굵은 봉을 꽂고 귀를 대보면 산란을 앞둔 민어 무리가 근처에 있는 경우, 마치 개구리나 두꺼비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민어는 예로부터 백성의 사랑을 받아온 물고기이다.

 

제사상에는 숭어와 함께 길게 자리를 차지한다. 양념을 발라 구운 민어는 맛이 담백하고 감미롭다. 민어회는 살이 희고, 고소하여 단맛이 돈다. 민어는 얼큰하게 찌개를 끓여도 맛이 좋고 시원하게 말간 국을 끓여도 담백한 맛이 돈다.

 

민어살을 떠서 말린 민어를 설탕·간장에 담궜다가 그늘에 말려 술안주로 쓰면 비할 것이 없다. 민어는 삼복더위에 복달임으로 이만한 보신탕이 없다(월간 샘터. 1990년 9월).

 

굴업도는 조기 어장으로 유명했을 뿐만 1916년 안간망을 이용한 민어 어장을 개척한 후 ‘민어 파시’가 형성돼 1920년대 조기와 민어의 주요 어장이었다.

 

그러나 1923년 8월 큰 폭풍으로 민어 파시는 철시되고, 1927년 근거지를 덕적도 북리로 옮겨갔다고 한다.

 

연평도 조기잡이가 5월 말경 끝나면 새우잡이를 시작하고, 7월 중순부터 덕적도, 굴업도, 백아도 근방에서 민어잡이를 했다고 한다.

 

특히 선미도, 소야도 반도골(소야도와 소이작도 사이), 백아도, 강화 주문도 근처에서 대형 민어들을 주로 잡았다고 한다.

 

1930년대 덕적도 민어잡이 어선은 300척 이상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백아도에 사시는 고봉덕 어르신은 “어릴 적 저녁을 먹고 집안 마당에 나와 있으면 민어 소리가 마치 개구리가 울음소리처럼 들렸다”고 했다. 그만큼 민어가 많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통계를 보면, 1952년부터 1972년까지 우리나라 민어 어획량을 보면 1960년대 민어 어획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1964년 4174톤으로 최고를 기록한 후 감소하기 시작하여 1971년 967톤으로 감소했다.

 

1958년 당시 우리나라 민어 전체 어획고는 1527톤에 달했으며, 이중 인천에서 650톤이 잡혀 국내 전체 어획량의 42.6%를 차지했다. 민어는 조기와 함께 서해안의 대표 어종이었다.

 

그러나 7월~9월 민어를 잡다가 간혹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선원들이 행방불명됐다.

 

예컨대 1931년 8월 18일 덕적도 근방에서 민어잡이 도중 태풍을 만나 55명이 조난 당했는데 이를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조난자 위령지비’로 현재 덕적도 자갈마당 입구에 서 있다.

 

당시 덕적도는 민어잡이 배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민어 조업기와 태풍 시기와 일치했다.

 

배들 대부분은 소형어선이라서 일기 예보를 모르고 조업하다가 사고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7월~9월에 섬을 방문하면 마을에서 같은 날 제사가 동시에 있는 것을 보곤 하였다.

 

1959년 금성사가 최초의 국산 라디오를 출시했지만, 당시 밀수된 외제 라디오들이 많이 유통되는 바람에 계속 적자였다고 한다.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몇 달 뒤에 금성사 라디오 공장을 방문했다.

 

그후 정부에서는 국정홍보를 위해 농어촌에 라디오 보급을 전개하였다. 라디오 보급은 날씨에 민감한 어민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서해안의 대표 어종이었던 인천의 민어 어획량은 1981년 242톤, 1990년 169톤, 2000년 15톤, 2010년 43톤, 2022년 2톤으로 1990년 중반부터 급격하게 감소한다.

 

 

1970년대 이후 동중국해 진출과 원양어선의 발달로 원양어선으로 잡은 민어와 민어류가 증가한다.

 

굴업도와 덕적도 민어는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 어르신들이 추억 중 하나의 이야기가 됐다.

 

어르신들의 이야깃거리로만 존재하는 인천의 대표 어종이었던 민어가 부활할 방법이 있을까?

 

글 : 김용구 박사(인천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인천시 섬발전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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