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는 바로 ‘협상’이다. 협상을 통해서만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합의를 위해서는 타인의 양보를 받아내고 자신도 양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효율적인 제도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제도를 만들어낸다.
협상 과정에서 상대방과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개진할 수 있어, 합의에 다다르면 협의 당사자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협상에는 일단 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에 충실한 행동인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작금의 의정 갈등의 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의대 정원 확대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주무 부서 장·차관의 대응 능력도 문제지만, 불과 두 주 전에는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을 재논의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가, 이번에는 원점 재논의가 가능하다는 식으로 입장을 180도 선회한 대통령실도 문제다. 그럼에도 어쨌든, 대통령실이 뒤로 물러섰으니, 협상의 상대방인 의사들도 한발 양보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 첫발은, ‘여야의정’ 협의 기구에 의사들이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은 2025, 2026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은 이전 상태로 유지하고, 2027학년도 입학 정원부터 논의하자는 전제를 내세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의사들이 진짜 이런 전제가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지난 월요일부터 각 대학의 수시 원서 접수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아직 수시 전형이 끝날 때까지는 두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니 2025학년도 입학 증원부터 백지화 하자는 논리를 내세운다.
만일 그렇게 하면, 의대를 지원하려고 재수 삼수하면서 다시 입시 준비를 했던 학생들이나, 처음부터 의대를 준비했던 학생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의대를 제외한 다른 이과 수험생들에게 미칠 파장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상되는 교육적 피해가 이렇듯 막중한데, 이를 도외시 하는 태도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의사들의 태도가 이러니 여론 조사에서도 의사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여론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지난 30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 조사(8월 27일부터 29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1002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 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의대 증원 관련 신뢰 대상을 묻는 문항에서, 정부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38%, 의사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36%였다. 정부나 의사나 똑같이 문제라는 여론이 지배적인 것이다.
이런 수치가 의미하는 것을 정부와 의사들은 잘 생각해야 한다.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어떤 행위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국민들이 과거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했던 이유도, 그리고 지금 정부의 대응을 믿지 못하겠다고 돌아선 이유도, 모두 자신들의 생존과 관련한 ‘이익’ 때문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 의사들도 ‘여야의정’ 협의체에 참여해야 한다. 협의체에 참여하지 읺으면서, 계속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이래저래 생존권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국민들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른다. 국민은 두려운 존재임을 모두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