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낸 약(藥)은 생각이다. 오랜 실패 끝에 터득한 처방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덮고, 생각으로 생각을 지운다. 덮고 지우기를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들린다는 생각마저 사라지게 된다. 아니 망각하고 만다. 들리는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 도망쳐서, 들림에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내게는 그것이 기쁨이다. 들리지 않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선 쉬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생각을 멈추면 기쁨도 따라서 멈추고 만다. 기쁨이 멈춘 자리에 남는 건 소리다. 풀벌레 울음 같은 그 소리. “찌르르르.” 헤아려 보니 벌써 이년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귀울림(耳鳴)에 시달리고 있는 게.
귀를 막으면 도리어 또렷해진다. 없는 소리를 있는 것처럼 지어내서 들려주는 녀석의 정체는 뇌(腦)다. 왜 그러는지 첨단 의료 장비도 알지 못한다. 없는 소리 때문에 하루가 기울어설까. 언제부턴가 어지럼증까지 도졌다. 귀울림과 어지럼증이 합세하는 날이면 하루가 지옥 같다. 간신히 살아낸다는 표현이 적확하리라. 간신히 길을 걷고, 간신히 글을 썼다. 이러다 영영 뛰지 못하는 건 아닌가. 조기축구를 하는 사람을 보면, 운동장을 달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부러웠다. 도심의 굉음 안으로 들어가기가 겁이 나서, 약속도 만남도 잡지 못했다. 그래서겠지. 일부러 피한다며 오해하는 사람조차 생겨난 것도.
누군가는 백 년만의 더위라고 했다. 새벽이 되어도 아스팔트는 식지 않았다. 하루는 식지 않은 도로와 건물 위로 다시 더위를 쏟아냄으로 시작되었다. 하루하루가 어지러움의 연속이었다. 드러누웠다 앉기를 반복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후배였다. 그림을 그리는 녀석인데, 첫 마디가 “전화 받아줘서 고마워 형.”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듣게 된 사연은 놀라웠다.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가. 엄마가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죽음 직전에 엄마를 끌어내리는 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치매 때문이었겠지. 가정도 꾸리지 못하고 혼자 사는 아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서.
트라우마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마비 증상이 생겨서 목발을 짚는다고도 했다. 그리곤 덧붙였다. “글 하나 써주라 형.” 직장도 잃은 지금, 집에서라도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동화든 뭐든 다 좋아.” 어떤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 같은 게 뭐라고. 별것도 아닌 내 글에 그림을 입혀 보고 싶다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야 참았던 감정이 북받쳤다. 곱씹을수록 기가 막혔다. 헤어질 결심을 한 것도 그때였다. 나의 아픔 따위 덮어버릴 용기가 생겼달까. 지긋지긋한 어지럼증 따위 그만 작별하자. 헤어져야 글도 쓸 수 있으니.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이가 김대경 원장이다.
한방치료를 받겠다고 하자 반대하는 가족이 많았다. 딸과 며느리가 대학병원 간호사 출신이다 보니 예상된 반대였다. 하지만 반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신도림에 있는 한의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혼자 걷지 못하고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런 내가 두 번째부터는 혼자 걸어서 치료받으러 갔다. 열 번이었을까. 치료를 받은 뒤에는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물론 완전히 치료된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귀울림은 있고 어지럼증도 겪는다. 그래도 살 것 같다. 걸을 수 있어서 살 것 같고, 글을 쓸 수 있어서 살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이 ‘살 것 같음’은 후배의 아픔에서 생겨났다. 기억하자. 아픔에는 또 다른 아픔을 치유하는 힘이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