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 말부터 주식 등 기존에 보유한 투자상품을 현금으로 바꾸지 않고도 퇴직연금 운용사를 갈아탈 수 있는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시행된다. 약 400조 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 내에서 고객들의 이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기존의 고객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고객을 확보해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금융사들 간의 사활을 건 경쟁이 펼쳐질 전망이다.
14일 금융당국 및 금융권에 따르면 오는 31일 퇴직연금 가입자가 기존 운용상품의 매도(해지) 없이 퇴직연금 사업자(금융사)를 변경할 수 있는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가 개시된다. 총 44개 실물이전 대상 퇴직연금 사업자 중 37개사(적립금 기준 94.2%)가 서비스를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퇴직연금 계좌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려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상품을 모두 매도해 현금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가입자는 중도해지로 인한 손실이나 만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으나, 퇴직연금 실물이전이 시작되면 대부분의 상품을 그대로 둔 채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금융사만 바꿀 수 있다.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고 은행에서 증권사, 증권사에서 보험사 등 업권에 관계없이 퇴직연금을 옮기는 것도 가능해진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시행되면서 400조 원에 육박하는 퇴직연금 시장의 머니무브는 가속화될 전망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액은 382조 3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46조 4000억 원 급증했다. 성장 속도 또한 빨라서 오는 2026년 시장 규모가 500조 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금융사들은 자체적으로 태스크포스(TF)를 마련해 상품 라인업을 확대하고 마케팅을 강화하는 등 대비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고객들의 이동이 쉬워지는 만큼, 금융사들 사이의 뺏고 뺏기는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은행들은 다양한 상품을 마련하고 영업점 등을 통해 고객과의 접점을 넓히는 등 기존의 고객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 모두 예금·펀드·ETF 등 퇴직연금 관련 상품을 늘리며 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또한 대면 상담 채널을 확대하고 전문 인력을 활용해 연금 세미나와 같은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은행권이 퇴직연금 시장을 사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은 수익률이 높은 증권사로 고객들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지난해 기준 은행권의 퇴직연금 적립액 전체 시장의 51.8%를 차지한다. 하지만 최근 5년 평균 수익률은 금융권을 통틀어 증권사(2.9%)가 가장 높다. 게다가 ETF의 경우 은행 연금 계좌에서는 100~170여 개의 ETF를 거래할 수 있지만, 증권사에서는 최대 700개까지 투자가 가능하다는 한계도 있다.
이와 동시에 신규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마케팅도 강화하고 있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각각 윤종신·이정하와 아이유가 모델로 출연하는 퇴직연금 광고를 새로 공개했다. 또한 4대 은행 모두 퇴직연금 실물이전을 신청하는 고객에게 포인트, 기프티콘 등 경품을 제공하는 이벤트도 진행 중이다.
증권업계 또한 높은 수익률을 내세우며 각종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신한투자증권은 최근 개인형 퇴직연금(IRP) 광고 캠페인을 새롭게 선보였다. 미래에셋증권, 한국투자증권, KB증권 등 여러 증권사들은 퇴직연금 실물이전을 완료하거나 관련 상담을 진행한 고객에게 상품권을 제공하는 이벤트에 나섰다.
최재원 키움증권 연구원은 "한국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 기준 382조 원으로 연평균 성장률 15%를 기록하며 빠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며 "제도적 개선 및 다양한 자산 배분 상품 등장으로 국내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 고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