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오늘, 나는 뉴스를 통하여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목격하면서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초현실적 상황으로 여기고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래서 비교적 편하게 잠을 잤다. 실은 감기기운도 있었고, 술도 좀 하고 들어온 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한 밤이었다. 일어났을 때는 이미 계엄이 해제되어 상황이 끝나 있었다. 그 후 1년 동안, 나도 이웃과 벗들만큼 ‘계엄 트라우마’로 힘들게 지냈다.
다음은 비상계엄이 성공했다고 가정하고, 상상하여 쓴 글이다.
“우리는 다음 날부터 전혀 다른 세상에서 아침을 맞았다. 내가 사는 도시는 계엄군의 무쇠 발자국에 짓눌리고, 나의 일상은 말없이 조여드는 공포 속에서 서서히 숨이 막혀갔다. 침묵과 무표정으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친구가 주변을 살피며 짧게 전하는 귓속말은 모두가 곧바로 주저앉아 통곡해야 할 소식이거나, 분기탱천하여 웃통을 벗고 쫒아가서 응징해야 하는 내용들이었다.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질서 있게 보이지만, 이미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절망과 우울의 나라가 신진대사와 다름없는 희로애락의 표현을 막아버렸다.
가장 먼저 쓰러진 건 약자들이었다. 한낮에도 그늘지고 비가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반지하 주민들, 이웃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도시빈민과 쪽방촌 노인들! 그들은 마치 전쟁터의 맨 앞에서 총알받이 노릇하는 병졸들처럼, 나쁜 정치, 포악한 행정의 우선적 희생자집단이 되었다. 독재권력은 히틀러의 인종청소를 본받아 쓰레기 처리하듯 이 나라 바닥층 약자들을 그런 식으로 정리해 나갔다. 수많은 어린아이들과 노약자들이 해열제와 아스피린 한 알, 페니실린 연고 하나로 이길 수 있는 증상에도 방치되었다가 죽어갔다. 그들의 죽음은 통계에 잡지 않았고, 한 줄의 보고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마치 치명적 전염병 환자처럼 먼저 떼죽음을 당했다.
가족을 잃은 대부분의 유가족들은 장례조차 재대로 치르지 못했다. 장례식처럼 번거롭고 여러 날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의식은 규제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아부쟁이가 일종의 허례허식에 해당된다며 박정희 시절의 규정을 찾아내어 기레기언론이 나팔을 불게 만들었다. 어떤 이는 죄없이 체포되어 끌려간 자식을 찾아 날이면 날마다 관공서와 변사자 처리시설을 전전했지만, 명부에 없다, 곧 돌아오지 않겠냐, 는 허망한 소리를 듣는 게 일상이었다. 아이를 찾지 못한 부모는 자책과 죄의식 속에서 병들어갔다. 그 절망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수괴와 그 패거리들은 보란 듯이 옛날 왕실처럼 관혼상제를 거하게 치르며 위세를 부렸다.
학교는 ‘교육의 장’이 아니라 아부와 충성의 훈련소로 전락했다. 생각이 깊고 질문이 많은 아이들은 문제아 취급을 당했다. ‘비판적 사고’란 말은 교과서에서 지워졌고, 교사의 입에서도 발설되지 않았다. 전라도의 한 교사는 아이들에게 '창조적 파괴'의 개념과 가치를 가르쳤는데, 그것이 체제를 위협하는 선동으로 간주되어 해직되었다. 그 교사를 편들며 교육청의 조치에 항의하던 학생대표는 실종되었고, 몇 달 뒤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마흔 살에 얻은 아들이었다. 엄마는 자살했다. 신문에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다. 그 억눌린 슬픔과 분노는 거대한 침묵의 공동체, 즉 죽음의 도시를 작동시키는 기괴한 에너지가 된 것이다.
언론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국가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 슬로건은 브리핑, 뉴스, 학교, 버스정류장 전광판, 관공서의 벽면까지 사회 전반을 뒤덮은 부적이었다. 기레기들은 앞장서서 온 국민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엔지니어였다. 그들은 월급의 몇 배를 더 버는 고소득자들이었다. 병역기피 등 예전에는 대통령도 할 수없던 민원을 얼마든지 해결했다. 물론 유료다. 촌지를 거절하고, ‘알바’를 안뛰는 ‘고고파’는 무능으로 낙인찍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시인은 촛불 끝의 떨림을 쓰지 못하고 검열관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다. 소설가는 등장인물의 운명보다 보안관찰관의 눈빛을 의식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민주진보 세력이 부르던 노래들은 지하에서조차 들을 수 없었다. 악기들은 먼지 구덩이에 처박혔다. 감동의 무대는 사라지고 정부가 동원하여 세우는 무대만 살아남았다. 우리는 끝내 긴 가뭄의 들판처럼 균열되었다. 아무리 큰 참사가 벌어져도 보도를 통제하여 소문으로만 알게 되는 나라가 되었다.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12.3 비상계엄이 성공했더라면, 위에서 상상한 내용들은 기본이고, 그보다 열배나 백배가 되는 비극들도 별일 아닌 것으로 축소되어 알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을 것이다. 나라는 거덜나서 미국이나 중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보다 더 흉포한 지옥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새 정부가 5년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