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퇴계 이황(1502-1571)과 성리학자로 쌍벽을 이루는 학자였다. 게다가 조선최고의 행정가이고 '언론가'였다. 천재였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은 그의 별명이다. 각종 과거시험에서 아홉 차례나 장원을 했기 때문이다. 13세 나이에 진사 초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29세에 공직을 시작했다. 그 후 49세에 세상뜨기 전까지 그의 업적들은 하나같이 위대하다.
조선을 개혁하기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제안했다. 대동법실시, 10만 양병설 등을 주장하며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에 직을 걸고 일했다. 명종 때(1545-1567) 정계입문했지만, 주로 선조 때(1567-1608) 큰일을 많이 했다. 임금에게 9차례나 사표를 던졌다. 자신의 몸을 갈아넣어 만든 개혁안을 선조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과로로 몸이 상하여 요양을 반복해야 했다.
그는 호조(재무), 이조(인사), 병조(병역) 등 세 차례의 판서를 역임했고, 판서가 되기 전에는 대사헌(감사원장) 우찬성(국정상황실장에 가까운 직책) 등 최고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율곡은 어느 자리에 가든 개혁정치가로서 임금에게 거침없는 발언을 하며, 나라의 안위와 민생의 수준을 높이는 일에 헌신했다. 공직생활 동안 59회나 상소(上疏)를 했다. 그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그가 쉰 살 되기 전에 작고한 것은 나쁜 임금을 모시며 피할 수 없었던 스트레스와 과로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임철순(전 한국일보 주필)의 '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이라는 책을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장관이든 총리든 고위관료들이 최고수반 앞에서 예의바르고 점잖고 과묵한 것이 결코 미덕일 수 없겠다는, 실은 악덕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임금이든 대통령이든 사실상 보통 사람들과 별 차이 없이 크고 작은 결점과 약점이 있는 자들인데, 그들의 최종 의사결정은 나라의 존망과 씨알들의 삶의 질은 물론 생사의 문제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준다. 율곡의 정론직필(正論直筆)은 구국안민(救國安民)이 목적이었다.
윤석열은 비민주 전근대 반문명적 인간이다. 생각은 더럽고 흉포했다. 무능 무책임 무도한 자로서, 악마의 리더십을 총칼처럼 휘두르다가 파면되었다. 선조를 많이 닮았다. 그렇게 저열한 왕초 밑에서 뛰는 조폭들은 '곤조'가 비범한 어린 중고생 1진들에게 수시로 코피 터지고 갈비뼈 나가기 일쑤다. 당장, 현직 경제부총리가 돈벌이로 미국국채에 투자하고, 검찰총장은 딸을 좋은 공직에 불법취업시킨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데도 태연하다. 둘만이 아니다.
새 정부의 요직에 앉게 될 사람들은 임금에게 직을 걸고 목숨 걸어 직언했던 율곡의 반의 반이라도 할 수 있기 바란다. 장관된 걸 큰 은혜로 여겨 '깍두기'처럼 굴지 말라. 율곡이 임진왜란 10여년 전 올린 상소문의 한 문장이다. 시공을 초월한 교훈이다. "백성들은 이미 원기(元氣)를 잃었고, 10년 안에 화란(禍亂.재앙)이 일어나면 더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선조의 무능과 무책임, 무방비를 이렇게 직격했다.
율곡은 사표를 던지고 나가서는 대장간을 운영해서 쌀독을 간신히 유지했다. 움막집도 절친 성리학자 성혼(成渾.1535-1598)이 보내준 건자재로 어렵게 지었다. 공직자는 국민세금으로 평생을 호의호식한다. 그 이상 뭣이 더 필요한가. 내가 너무나 순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