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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문학 살롱 이야기] 백과사전의 산실, 레피나스 부인의 살롱

 

계몽주의 시대 파리 문학 살롱은 다양한 계층이 섞일 수 있는 장소였다. 여성도 초대되어 성별, 사회적 지위, 재능이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진정한 향료 단지가 되었다. 또한 작가와 출판사를 연결하고 사상가와 다른 사상가를 연결하여 아이디어의 확산을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미국 역사학자 J. W. 욜튼은 “사회적 침투성 때문에 살롱은 프랑스에서 혁명 이전 사상의 중요한 포럼이 되었다. 궁정의 후원이 사라지고 출판 산업이 성숙되기 전, 살롱은 출판사와 후원자, 독자들이 작품을 제작하고 배포할 수 있도록 저자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도 했다”라고 평가했다.

 

이 살롱의 중심인물은 안주인이었으며, 그들은 종종 감각과 권위를 갖춘 중년 여성이었다. 그들의 개인적인 매력과 사회적 야망, 조직력, 지성, 재치, 좋은 취향이 살롱의 분위기를 결정했다. 물론 안주인들은 매주 또는 격주로 열리는 모임에 초대할 사람을 선택하는 책임도 있었다.

 

전편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탕생 부인, 데팡 부인, 조프랭 부인은 이를 모두 잘 수행한 안주인들이었다. 오늘은 그들의 후배이자 경쟁자였던 쥘리 드 레피나스(Julie de Lespinasse)가 운영한 살롱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볼 것이다.

 

레피나스는 ‘파리의 여왕’ 또는 ‘백과사전의 뮤즈’로 불릴 만큼 극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녀의 어떤 면이 이 같은 찬사를 받게 했을까? 쥘리 드 레피나스는 1732년 리옹에서 샹프롱 백작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녀는 고향 근처에 있는 아버지의 영지에서 적자녀들과 함께 성장했다. 이 시절 그녀는 영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 재원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어느 날, 그녀는 영지를 방문한 아버지의 여동생 데팡 후작 부인을 만나 친구 겸 시녀가 되었다. 이 둘은 곧 파리로 올라와 생 도미니크 거리에 있는 생 조제프 수녀원에 살게 되었다. 데팡 부인은 수녀원의 아파트에 문학 살롱을 열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레피나스와 데팡 부인의 동거 초기는 꿈같은 밀월 관계였다. 이들의 삶은 변함없는 의식으로 점철되었다. 데팡 부인의 살롱에 파리의 지식인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은 의식의 일부였다. 손님들 사이에 레피나스가 도착하면 그들은 열광했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를 소유한 건 아니지만 품위가 넘쳤다.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싶은 그녀의 욕망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음성은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재치에 귀 기울이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고 화끈한 성격이었지만 절제가 있었다. 이는 지나치게 예의 바른 궁정 사회의 냉소적인 정서와 대조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지루함을 두려워하는 데팡 부인에게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시력이 악화돼 가는 고모에게 조카는 분명 큰 의지처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레피나스는 손님 중 신비로운 아일랜드인 백작에게 빠져 들었다. 하지만 고모인 데팡 부인은 그가 방문할 때 마다 조카인 레피나스를 방에 가두고 못 나오게 했다. 충격을 먹은 레피나스는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이 둘은 결별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계기는 달랑베르였다. 기하학자이자 철학자인 달랑베르는 위대한 백과사전의 집필 등 여러 활동에 참여했던 유명 인사로 오랫동안 후작 부인의 단골손님이었다.

 

 

레피나스는 데팡 부인에게 직업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진정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데팡 부인의 살롱이 공식 개장하기 한두 시간 전에 당도한 몇몇 손님을 데리고 레피나스는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가 달랑베르와 함께 사전 파티를 열고 작은 내부 계단을 통해 데팡 부인의 살롱으로 내려가곤 했다. 1764년 4월 이 사실을 알게 된 데팡 부인은 펄펄뛰며 분노했고 결국 레피나스는 생도미니크 수녀원 근처 벨샤스(Bellechasse) 거리 모퉁이에 자신의 살롱을 열었다. 데팡 부인의 살롱에서 약 100미터 떨어진 작은 목조 건물의 2층집이었다. 1층에는 거실, 침실, 욕실, 또 다른 직원실이 있었고 2층에는 주방, 하인 방, 몇 개의 창고가 있었다. 이 새로운 살롱은 데팡 부인이나 조프랭 부인의 살롱과 달리 행동 강령이 훨씬 덜 엄격해 보였다. 레피나스 부인은 경쟁자들만큼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녁 만찬 대신 간소한 음식을 제공했다. 이곳의 슬로건은 소박함이었고 이는 지적인 손님들을 만족시켰다.

 

데팡 부인의 살롱에 싫증난 파리의 많은 지식인이 그녀의 살롱으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백과사전 편찬에 전념했고 곧 이 살롱은 ‘백과사전의 실험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과사전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달랑베르와의 변함없는 우정이 이러한 명성을 쌓는데 크게 기여했다.

 

레피나스 부인은 훌륭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갔다. 그녀는 손님들을 즐겁게 대접했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빛나게 했다. 그녀의 살롱은 또한 표현의 자유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더욱이 이 살롱은 공화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던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로도 유명했다.

 

한편, 1766년 7월 흄 사건으로 루소를 파멸시키려는 소위 ‘전쟁 회의’도 바로 이곳에서 열렸다. 달랑베르, 뒤클로, 모렐레 신부, 마르몽텔, 튀르고가 모두 참여했다. 디드로는 정기적으로 참석했지만, 달랑베르가 백과사전 편찬 사업에서 손을 떼자 발길을 끊었다. 철학자들이 여러 아카데미(프랑스 아카데미, 과학 아카데미)를 인수하고 각 부처에 인재를 배치할 전략을 결정한 곳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레피나스 부인은 선배 언니들 보다 더 지적이고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다. 그녀는 수많은 작품을 남긴 편지 작가였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레피나스는 여러 연인을 사귀었다. 1766년에 만나 결혼을 고려했던 모라 후작과, 1774년에 애인이 된 기베르 백작과 열띤 서신 교환을 이어갔다.

 

하지만 열렬한 연애는 모두 실패로 끝나 우울증이 심했고, 30대 초반에 걸린 천연두로 얼굴에 흉터뿐만 아니라 두통에 시달리며 건강은 악화되어 갔다. 게다가 가족과의 적대감은 이 낭만적인 여성을 종말로 내몰았다. 1774년 살롱을 폐쇄했던 그녀는 1776년 살롱을 일시적으로 다시 열었지만, 1776년 5월 23일 마흔 셋의 나이로 끝내 사망했다. 살롱의 단골손님들은 고모와 다른 파리 살롱들에게 맡겨졌다.

 

그녀의 죽음 앞에 볼테르는 깊은 애도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스피나스 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녀에 대해 들은 모든 이야기가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만들었다.” 독일 평론가 그림(Grimm Friedrich Melchior)은 “가장 다양하고, 때로는 가장 상반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아무런 노력 없이 하나로 모으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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