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失踪)이라고 하지요.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틀림없이 있기는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찬찬이 들여다보면 실종된 사람 참 많습니다. 절대로 없어져선 안 될 사람이 사라졌을 때는 눈앞이 깜깜합니다. 이를테면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거나, 생각만 해도 존경심이 솟구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동네든 직장이든 그 어디든, 그런 사람 하나쯤 있다는 것을요. 어쩌면 우리사회가 실종되지 않는 까닭도 그런 사람이 있어줘서일 겁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동네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는 그런 사람이 왜 거기에는 없는 걸까요. 그 무리와 그 집단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까요. 혹여, 노안(老眼)으로 돋보기안경을 쓰게 된 뒤부터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걸까요. 주소도 이름도 필요 없었습니다. 편지 겉봉에 ‘런던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에게.’라고만 쓰면 배달이 되었습니다. 바로 윈스턴 처칠입니다. 그는 BBC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뽑히기도 하였습니다. 부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부러움은 처칠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사람들에게로 향합니다. 세상을 떠난 지 60여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존경할 대
고이는 것들이 있다. 속으로 깊어져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다. 겨울이 그렇고, 상처가 그렇고, 사람이 그렇다. 고여서 깊어지는 건 뭐든 아찔하다. 겨울이든 상처든, 사람이든 사람 아닌 것이든, 속으로 깊어져서 켜켜이 가라앉는 것들은 위험하다. 그래서 병(病)드는 줄도 모른다. 낙하를 거부하고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도 그렇다. 녀석을 가리키며 그 누가 간밤에 흩날린 눈이라고 하겠는가. 간신히 붙들고 매달린 수직의 눈물 작대기를 보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본래 같은 것들이라 단정하진 말기로 하자. 비든 눈이든 얼음이든 벗겨놓고 보면 똑같은 것이라고.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쇼윈도 속 마네킹 같은 것이라고. 쉬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섣부른 결정은 때늦은 후회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니까. 쌓이는 것들이 있다. 안으로 깊어져서 아득해지는 것들이다. 세월이 그렇고, 고독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다. 쌓여서 깊어지는 건 뭐든 애처롭다. 세월이든 고독이든, 사람이든 사람 아닌 것이든, 안으로 깊어져서 켜켜이 고립되는 것들은 위험하다. 그래서 하얗게 소멸하는 줄도 모른다. 드러내지 못하고 나무껍질 속에 똬리 튼 나이테도 그렇다. 녀석을 가리키며 그 누가 고스란히 기록된 아름드
달력에는 내일이 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고, 겨울 다음은 봄이다. 그래서 산다. 오늘이 아니어도 내일이 있으니까. 어쩌면 희망이라는 것도 거기서 싹이 틀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아스라한 틈에서. 끝이 시작으로 이어지는 아찔한 경계에서. 지고 있는 선수가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맬 수 있음도 그래서다. 아직 후반전이 남았으니까. 다시 따라잡을 기회가 남았으니까. 다시 달릴 수 있고, 다시 꿈꿀 수 있고, 다시 도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경기장에 있는 그 ‘다시’가 우리네 삶에는 없다. 사람이라 이름 붙여진 동물에게 ‘다시’란 없다. 언어와 국적에 상관없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사람은 우리가 사는 별 어디에도 없다. 늘 아쉬운 것도 그래서겠지. 한 번뿐인 청춘이라서. 아쉽다고 해서 다시 살아볼 수 없는 게 삶이라서. 돌아볼수록 아쉬운 것투성이다. 나의 지난날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풀림 보다는 막힘과 엉킴과 틀어짐이 많았다. 그것이 ‘살아내는 재미’라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살아내는 재미’가 두렵기 시작하더라는 고백은 해야겠다. 그래서일까. 열 번 막히고 스무 번 엉키고 서른 번 틀어지더라도, 한 번쯤 술술 풀어졌으면 좋겠다. 막힌 골목 끝에
미국의 아치미션재단이 ‘억만년 보관소(Billion Year Archive) 프로젝트’를 추진하였습니다. 혹시 닥칠지 모르는 지구 최후의 날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인류의 지식과 지혜가 담긴 백업자료를 달에 보관하려고 했습니다. 그 백업자료를 통해서, 살아남은 후손들로 하여금 인류의 문명을 다시 복원시키겠다는 취지였습니다. 2019년 아치미션재단은 3천만 페이지 분량의 저장장치 25개를 탐사선에 실어 달로 보냈습니다. 이 때 실어 보낸 저장장치를 ‘달 도서관(Lunar Library)’이라고 부릅니다. 달 도서관에는 위키백과 영어판과 5000가지 언어로 제작된 번역샘플 15억 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탐사선은 무사히 달 표면에 착륙하지 못했습니다. 달의 표면 어딘가에는 지금도 부서진 달 도서관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달 도서관과 함께 나뒹굴고 있는 위키백과는 온라인 백과사전입니다. 위키백과는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웹 기반의 백과사전입니다. 위키백과는 누구나 참여하여 문서를 수정하고 배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상업적인 목적으로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러다보니 종이로 만든 백과사전은 경쟁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244년의 역사를 자랑하
책 한 권을 만들려면, 5m 높이의 나무 한그루가 필요합니다. 그 나무가 온전히 자라는데 걸리는 시간은 30~60년입니다. 나무의 전 생애를 바쳐야 책 한 권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노르웨이에서 가문비나무 묘목 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2014년에 심어진 이 나무들은 백 년 동안 베지 않습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작품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한 사람의 작가에게 한 편의 작품을 부탁했습니다. ‘마가렛 앳우드’, ‘데이빗 미첼’ 등이 요청에 응했습니다. 요청에 응한 작가 중에는 우리나라 소설가 ‘한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꺼이 내놓았지만 작품은 누구도 읽을 수 없습니다. 모아진 작품들은 단단히 봉인되어 오슬로 공공도서관 ‘침묵의 방’에 백 년 동안 보관됩니다. 봉인된 작품을 읽으려면 백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봉인은, 가문비나무 천 그루를 심었던 2014년부터 정확히 백 년 뒤인 2114년에 풀립니다. 봉인이 풀린 작품을 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2014년에 심은 천 그루의 가문비나무입니다. 백 년 전에 심었던 가문비나무 천 그루로 백 편의 작품을 책으로 묶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래도서관’이라
아이들이 독립했다. 세 아이 모두 오롯이 홀로 섰다. 아이들이 떠난 둥지는 겨울들녘이다. 씨앗과 줄기와 열매는 떠나고 냄새만 남았다. 겨울들녘의 냄새는 춥고 쓸쓸하다. 보듬는 냄새마다 어김없이 명치끝에 박힌다. 나는 차마 냄새를 떨어내지 못하고 도리질한다. 그때마다 길게 누운 그림자가 내게 묻는다. 겨우살이 준비는 했어? 나는 우물쭈물 대답을 찾지 못한다. 발끝만 보며 아득바득 살아온 내게 겨울을 날 준비라니. 식량은커녕 땔감조차 옹색하다. 어쩌자고 이렇게 살았을까. 어디를 둘러 봐도 겨울들녘엔 내 그림자뿐이다. 생계형 글쟁이로 살았다고? 시답잖은 소리. 뿌리내린 나무 하나 없는 글쟁이에게 겨울바람을 견뎌낼 기둥은 없다. 그래서겠지. 겨울들녘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귓속을 울린다. 삐이이이. 종일 울려대는 소리는 이제 그만 들녘을 떠나라는 경고음 같아 숨이 가쁘다.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어지럽다. 뜨거운 열기가 경동맥을 타고 머리로 치솟는다. 눈앞이 흐릿해서 걷다가도 주저앉기 일쑤다. 두 달째 이 모양이다. 동네병원에서는 경추디스크라고 하였지만 대학병원의 판단은 달랐다. MRI 판독 결과 경추불안정증이 의심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랜 검사 끝에 얻은 결론은 ‘해당
우리는 잊고 산다. 우리가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쏜살같은지.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내달린다. 내달릴 때, 우리의 속도는 시속 11만km다. 총알보다 30배 빠른 속도다. 방향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1초에 30km를 달린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별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공전(公轉) 속도다. 그렇다고 앞만 보고 무작정 달리는 건 아니다. 총알 보다 빨리 달리면서 뱅글 돌기까지 한다. 뱅글 돌 때, 도는 속도는 시속 1667km다. 경주용 자동차 보다 5배 빠른 속도다. 방향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1초에 460m를 내달린다. 그것이 지구라는 초록별의 자전(自轉) 속도다. 초록별에 붙어사는 온갖 것들은 그 두 가지 속도에 기대어 산다. 공전과 자전이라는 두 가지 속도 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죽이고 죽는다.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날아가는지. 얼마나 쏜살같이 돌아가는지.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처럼, 지구라는 별을 타고 날아가는 우리는 속도를 느끼지 못한다. 느끼지 못해서, 지구라는 별이 품고 있는 두 가지 속도의 경이로움 또한 망각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공전(公轉)을 멈추면 지구에 사는 모든 것들은 죽는다.
눈을 감습니다. 보다가 맙니다. 말았어도 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본 것은 눈 바깥의 일이지만, 못 본 척 하는 것은 눈 안쪽의 일입니다. 눈 바깥이 세상이라면 눈 안쪽은 사람의 영역입니다. 사람의 영역에서는 생각이 으뜸입니다. 으뜸은 사람마다 서로 달라서, 보는 것에 대한 반응 또한 서로 다릅니다. 보이는 것은 하나인데, 보고 싶다거나 보기 싫다거나 못 본 척 시치미를 떼기도 합니다. 늙음 때문일까요. 아니면 낡음 때문일까요. 나는 자꾸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귀를 닫습니다. 겁먹은 하루가 안으로 돌아앉습니다. 안으로 돌아앉는다고 바깥의 일부가 아닐 순 없습니다. 시간은 안팎 어디서도 고르게 흐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시간 말입니다. 시간은 그 무엇보다 공평합니다. 사람이든 사람 아닌 것이든 시간 앞에 영원할 수 없습니다. 영원은,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수 없이 많은 신화(神話)가 만들어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상상으로 빚어낸 신화의 뿌리에는 사람의 욕망이 있습니다. 신화를 먹고 자라난 온갖 신(神)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있을 수 없는 영원처럼, 신화 속의 신(神)들 역시 우리가
아기들은 삼등신이다. 머리와 몸과 다리의 비율이 그렇다. 같은 길이는 불편하다. 앉고 서고 걷는 것이 모험이다. 모험에는 좌절이 함께여서 아기들은 넘어지는 것부터 배운다.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스스로의 터득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은 실패를 넘어 아기들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뒤뚱거리며 한걸음씩 위치를 옮긴다. 옮길 때, 아기들이 나아가는 방향은 일직선이다. 주저와 망설임은 아기들의 것이 아니다. 아기들의 걸음걸음은 정확히 순수와 일치한다. 감추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꽃밭으로만 향하지도 않는다. 송곳니를 드러내는 뱀을 향해서도 아기들은 손을 뻗는다. 뻗는 손을 따라서, 머리와 몸과 다리가 뒤뚱거린다. 어른들은 칠등신이다. 지위와 재산과 나이의 비율이 그렇다. 비율이 길어질수록 사는 게 고단하다. 앉고 서고 걷는 것이 죄다 돈이다. 돈은 성공의 다른 말이라서 어른들은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어른들의 배움은, 그러니까 돈을 버는 방법에는 끝도 없고 한도 없다. 훔치거나 속이거나 빼앗아서 돈을 버는 어른도 있지만, 대부분은 키우거나 팔거나 바꾸거나 만들어서 돈을 번다. 간혹,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나 같은 어른도 있는데 ‘등신’ 소리 듣기 십
일초라는 시간은 짧다. 틱, 하면 사라지고 틱, 하면 나타난다. 틱, 하는 순간 소멸해버릴 작은 단위를 왜 사람은 시간의 범주에 포함시켰을까? 하찮아 보이지만, 일초가 지닌 의미는 흥미롭다. 일초는, 야구경기에서 투수 손을 떠난 야구공이 배트를 맞고 다시 투수에게 날아가는 시간이다. 일초는, 재채기를 할 때 튀어나온 침이 백 미터 날아가는 시간이고, 총알이 구백 미터 떨어진 표적을 관통하는 시간이다. 뿐만 아니다. 달팽이가 일 센티미터 전진하고, 두꺼비 혀가 먹잇감을 낚아채고, 벌새가 육십 번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 모두 일초에 이루어진다. 범위를 지구촌 전체로 넓히면 일초가 지닌 의미는 더욱 흥미롭다. 일초마다, 세 번 결혼식이 열리고, 네 명이 태어나고, 두 명이 죽는다. 일초 동안,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사백팔십육억 킬로와트의 에너지를 받고, 사백이십 톤의 비가 쏟아지고, 일만 천 리터의 바닷물이 증발한다. 두 대의 승용차와 네 대의 텔레비전이 생산되고, 청바지는 칠십 벌, 신발은 백 켤레가 팔린다. 그것이 일초다. 오천칠백 리터의 탄산음료와 오십일 톤의 시멘트가 소비되고, 스물두 명의 여행자와 이십만 건의 문자메시지가 국경을 넘나든다. 틱, 하고 사라져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