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은 넷플릭스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연상호의 신작 영화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연상호가 왜 이렇게 ‘정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상상력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냈을까,가 하나이고(원작 웹툰은 연상호와 최규석의 공동저작이다. 아마도 연상호가 스토리를, 최규석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또 하나는 도대체 멕시코의 대표적인 감독 알폰소 쿠아론(‘그래비티’, ‘로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 수상했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영화의 기획에 참여했을까 라는 점이다. 뒤의 것은 특히 연상호가 인터뷰를 통해 직접 밝히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는 내용이다.(공식 인터뷰는 24일 있을 예정으로 이 글은 그 전에 작성된 것이다.) 영화 ‘계시록’은 연상호의 유명 드라마인 ‘지옥’ 시리즈나 ‘방법’같은 작품과는 다른 선상에 있는 것이다. ‘지옥’에서는 지옥의 사자가 나오고 ‘방법’에서는 죽은 자들이 살아나 살인을 저지른다. 극단의 상상력의 캐릭터를 앞세운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이번 ‘계시록’은 그보다는 현실 세계에 좀더 발을 붙이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대중들에게 다소 외면받았던, 연상호의 저주받은 걸작에 해당하는, ‘염
세상에서 위험한 것은 확신이다. 확신은 연대와 포용의 적이다. 영화 ’콘클라베’에 나오는 이 대사는 지금의 우리사회에 있어 진실로 귀담아들어야 할 경구이다. 이 말을 조금 더 확장하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그릇된’ 확신이라는 말이 된다. 한국의 선관위를 중국과 북한의 해커들이 조종하고 있다는 음모론, 대한민국에 현재 반국가세력, 종북 빨갱이들이 판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 등이 그것이다. 얼마나 위험한지는 지난 서부지법 난동 사태에서 확인한 바 있다. 폭동을 일으킨 주범 젊은이들에게 정신교육으로 ‘콘클라베’를 감상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영국의 대(大)감독 스탠리 큐브릭(1928~1998)은 자신의 1971년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청년 알렉스(말콤 맥도웰)에게 루도비코라는 갱생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사지를 의자에 묶어 놓고 눈을 감지 못하도록 눈꺼풀에 장치를 해놓은 채 역사 영화를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일종의 세뇌이다. 한국에서 요즘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극우 파시스트들을 보면 이렇게라도 강제적으로 의식을 개조하고 싶게 만든다. 극단은 극단을 낳는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된다. 그런 일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조 샐다나)에 빛나는 ‘에밀리아 페레즈’는 트랜스 젠더에 대한 얘기이다. 이런 소재를 낯설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낯설고 기괴한 이야기일 수 있다. 게다가 배경은 멕시코이다. 이국적이다. 해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국내에서는 어떨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두 가지 점에서 그 ‘전이(trans)’의 욕망이 강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성 전환을 넘어서 트랜스 휴먼, 곧 인간 변이까지를 꿈꾼다는 점이다. 주인공 델 몬테(칼라 소피아 가스콘 1인2역)는 멕시코에서 가장 잔혹한 마약 카르텔의 두목이다.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 해도 사람들은 심장이 떨려 혼비백산할 정도이다. 그는 애초에 얼굴이 알려져 있지도 않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를 부른다. 리타는 악덕 로펌에서 일하며 먹고 살기 위해 정의에 눈감고 돈이 되는 사건만을 좇아 살아가는, 자신의 현재적 삶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는 참이다. 얼마 전에도 아내를 때려서 살해한 한 부호 남자의 변호를 맡았으며 증인을 검시관을 매수해 사건을 뒤집기까지 했다. 그런 리타를 델 몬테 부하들이 두겁을 뒤집어 씌
감독 김대현이 만들고 송귀철 주연(아역 송정빈)의 영화 ‘정돌이’는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이다. 정돌이는 고려대 정경대 건물, 정경관에서 10대 시절을 노숙하며 보냈던 송귀철씨의 별칭이었다. 정경대 아이라는 것이다. 그는 14살 때 집을 나왔는데 그건 어머니가 그에게 500원을 쥐어 주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어린 나이에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이 아이는 집을 나와 청량리를 배회하다가 행정학과 3학년에 다니던 서정만을 만나게 되고 그의 손에 이끌려 고려대 안으로 들어 오게 된다. 서정만은 시위 주동자로 몰려 도피 생활중이었다. 그는 청량리 만화방을 전전하던 중이었다. 정돌이가 정돌이가 된 것은 이 만남이 계기가 됐다. 정돌이는 87년 형 누나들에게 농악을 배워 1992년 필봉농악을 배우기 위해 전라도의 한 지역으로 옮기기까지 5년간 고대 캠퍼스 안에서 풍찬노숙의 생활을 이어 나갔다. 정돌이를 놓고 정경대와 사범대가 양육권 다툼이 벌어진다는 농담이 오갔을 만큼 이 아이는 고대 운동권의 마스코트가 됐다. 한때 정돌이였던 송귀철은 현재 ‘사물놀이 미르’ 대표이다. 영화 ‘정돌이’는 저항과 연대의 기억이자 기록이다. 영화는 정돌이라
어줍잖게 영화를 제작하겠다며 나다닐 때 만든 영화가 김새론 주연의 ‘바비’이다. 한국에서 가장 별종 영화감독인 이상우(‘엄마는 창녀다’ ‘아버지는 개다’ ‘나는 쓰레기다’ 등 일명 쓰레기 3부작이 그의 주요 작품이다)가 만들었고 김새론은 여기서 친동생 김아론과 각각 순영, 순자 역할로 나온다. 순영은 거리에서 핸드폰 고리 품팔이로 살아 가는데 철없는 여동생 순자는 고사하고 지적 장애인인 아버지를 돌보느라 어린 삶이 고단하기 짝이 없다. 악마 같은 작은 아빠, 곧 삼촌은 돈을 받고 순영을, 바비 인형같이 생긴 미국 소녀에게 줄 심장이식 수술을 시키러 내보내려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영은 미국 가면 바비 인형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꼬드김에 그렇다면 자기보다 동생을 보내 달라 부탁한다. 비극이다. 2012년 작품이고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김새론이 11살 때였다. 김새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4살이다. 영화 ‘아저씨’로 급부상했었다. 8살의 아역 스타였다. 대체로 아역 스타들은 성장통을 겪는다. 그들 중 일부에게서는 술과 애정 스캔들이 터지기도 한다. 갑작스럽게 스타가 된 경우 대체로 그 부담감을 견디지 못한다. 언제 급전직하 인기가 떨어질지도 모
얼마 전 타계한 전설의 감독 데이빗 린치(LA 산불이 원인이었다)의, 역시 전설적인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3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더라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사람들의 지력도 높아져서 영화의 내용 중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비현실인지를 구분할 수는 있을 정도가 된다. 영화가 얘기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실제로 벌어졌고 어떤 것이 벌어지지 않은 일인가. 그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구분이 정말 필요하냐는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곧 멀홀랜드 도로는 할리우드 블로바드(대로) 혹은 선셋 블로바드 같은 LA의 주요 거점에서 휴양지인 산타 모니카로 넘어 가는 능선 도로 길이다. 비교적 위험한 산길 도로이고 그 아래 가파른 비탈에는 영어로 할리우드 알파벳 입간판이 크게 설치돼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으며 그곳에서 LA 도시 전경과 그 너머의 태평양 바다를 볼 수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전망대에서 보는 LA의 야경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필름 누아르(film noir)나 미스터리 영화에서 많이 쓰인다. 추적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쓰려는 영화 ‘쇼잉 업’은 지난 1월 8일에 개봉해 2주를 못 버티고 전국에서 단 7,949명을 모은 채 종영됐다. 모두 1월 말 개봉을 위해 전쟁을 벌인 국내 영화들 때문이다. ‘검은 수녀들’ ‘히트맨2’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전국 스크린을 장악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정곡을 찌를 말이 없어서 하는 얘긴데, 다들 쓰레기들이다. 이런 독설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돈 벌려고 만든 영화들이니 만큼 저열한 평가를 받은 들 그리 신경 쓸 것까지는 없겠다. 자 어쨌든 그러하니, 이 영화 ‘쇼잉 업’은 이제 볼 수가 없다.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가 됐다. 한국의 극장가 현실은 영화를 읽게’만’ 만든다. 근데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영화 ‘쇼잉 업’에 대한 스포일러를 잔뜩 뿌려 놓을 것이다. 잘 안다. 스포일러에 과민한 사람일수록 영화를 오히려 더 안보는 사람이라는 걸. 이 글 ‘쇼잉 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 OTT나 케이블TV에서 영화의 제목을 봤을 때는 이미 그 내용을 다 잊어 버렸을
한국의 정치상황에 가려서 그렇지 프랑스의 시국도 엄청나게 시끄러운 모양이다. 지난 해 마크 롱이 낙점한 중도 우파 성향의 미셸 바르니에 총리를 트로츠키 주의자 출신의 극좌 장 뤽 멜랑숑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대표가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과 담합해 불신임안을 성사시켜 몰아 낸 것이다. 이들은 마크 롱 대통령의 퇴진까지 몰아 붙였지만 마크 롱은 다시 중도 우파인 프랑수아 바이루를 임명해 고비를 넘겼다. 나치즘을 옹호하는 마린 르 팽의 국민연합에 왜 사회주의자인 멜랑숑이 협조하는지, 이쯤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상황이다. 정치는 늘, ‘앞단의 이야기들을 복잡하게 만들어’ 전체 이야기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프랑스 경제난이 대중들의 불만을 고조 시키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모두 이민자 탓, 자국의 노동권을 훼손시킨 탓이라는 식의 마린 르 팽의 주장은 ‘앞 단을 흐리게 하는’ 선동일 뿐이다. 프랑스 경제난의 본질은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신자유주의 노선은 자국 우선주의로 강화되고 있으며 미국의 새 대통령 트럼프가 보란 듯이 그걸 실현하려 하고 있다. 이민자 억제, 계층 계급에 대한 차별적 경제 정책
24년 전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만든 영화 ‘밀레니엄 맘보’를 다시 보는 것은 진실로 ‘천국보다 낯선’ 일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현재 치매 투병을 위해 은퇴를 했다. 그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전설이 됐다. ‘밀레니엄 맘보’는 2001년에 만들어진 영화이고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세기인 뉴 밀레니엄 시기의 기이한 희망, 일상의 불안, 흔들리는 세대에 대한 얘기이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모두들 환호했다. 다들 허우 샤오시엔의 걸작이 나왔다고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을까. 영화도 시대가 변하면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다르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 오래전 이 영화가 각광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스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렇다 할 서사가 없다.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라곤 비키라는 젊은 여자(서기), 그의 오래된 연인 하오하오(단균호) 그리고 새로운 남자 잭(고첩)이 맺어 가는 얽히고설킨 관계뿐이다. 얽히고설킬 것도 없다. 하오하오는 비키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하고 잭은 잭대로 더 이상할 만큼, 남자에게 시달리는 여자에게 늘 친절하게 잘 대해 준다. 잭은 비키의 은신처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이 20일 정도 남은 시점에서 미국의 상당 수 국민들도 향후 4년이 참 길 것이라는 자괴감을 가질 것이다. 우리도 2년 반 전쯤, 5년은 너무 길다라는 생각을 가졌었고 그 우려가 지금 현실로 다가서고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의 재등장을 걱정하는 미국 내 지식인의 목소리는 다양한 대중문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 『원더풀 랜드』와 영화 ‘시빌 워 : 분열의 시대’가 그것이다. 지난 해 연말에 개봉됐던 알리 아바시 감독의 ‘어프렌티스’란 영화도 트럼프 시대의 재개가 새삼 두렵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중 앞의 두 작품, 『원더풀 랜드』와 ‘시빌 워 : 분열의 시대’는 둘 다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깊은 증오의 정치가 미국이라는 큰 나라를 두 쪽으로 쩍 갈라 놓게 한 것을 소재로 삼고 있다. 소설 원더풀 랜드에서는 미국이 ‘연방 공화국’과 ‘공화국 연맹’으로 갈라지는데 그 영토의 분포도가 딱, 대선 때의 민주당 지지 주와 공화당 우세 지역이다. 거기에 독일 베를린 처럼 중립지대가 하나 있다. 그건 미니애폴리스이지만 왜 작가가 미니애폴리스로 잡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스윙 보트 지역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