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대현이 만들고 송귀철 주연(아역 송정빈)의 영화 ‘정돌이’는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이다.
정돌이는 고려대 정경대 건물, 정경관에서 10대 시절을 노숙하며 보냈던 송귀철씨의 별칭이었다. 정경대 아이라는 것이다.
그는 14살 때 집을 나왔는데 그건 어머니가 그에게 500원을 쥐어 주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어린 나이에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이 아이는 집을 나와 청량리를 배회하다가 행정학과 3학년에 다니던 서정만을 만나게 되고 그의 손에 이끌려 고려대 안으로 들어 오게 된다.
서정만은 시위 주동자로 몰려 도피 생활중이었다. 그는 청량리 만화방을 전전하던 중이었다. 정돌이가 정돌이가 된 것은 이 만남이 계기가 됐다.
정돌이는 87년 형 누나들에게 농악을 배워 1992년 필봉농악을 배우기 위해 전라도의 한 지역으로 옮기기까지 5년간 고대 캠퍼스 안에서 풍찬노숙의 생활을 이어 나갔다.
정돌이를 놓고 정경대와 사범대가 양육권 다툼이 벌어진다는 농담이 오갔을 만큼 이 아이는 고대 운동권의 마스코트가 됐다. 한때 정돌이였던 송귀철은 현재 ‘사물놀이 미르’ 대표이다.

영화 ‘정돌이’는 저항과 연대의 기억이자 기록이다.
영화는 정돌이라는 극적인 인물의 생애를 담는 척 사실은 84년 학번을 중심으로 한창의 고대운동권이 형성된 1987년 전후의 학생민주화 시위의 역사를 추적한다.
광주에서 저지른 전두환 학살 사건이 어떻게 광주민중항쟁으로 승화되고 서울대 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한국의 사회민주화 운동이 어떻게 자기희생을 감행해 나갔는지가 펼쳐진다.
다 아는 얘기지만 새삼 새롭다.
그 사이사이 전개됐던 소위 5.3인천 사태, 건대 사태, 전두환의 호헌 철폐를 위해 벌어졌던 6.10 항쟁 등 실로 뜨거웠던 역사의 기록들을 이어 나간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이른바 386 세대들조차 "우리에게 과연 저런 일들이 있었는가"라는 기시감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과연 한때나마 사회민주화를 위한 가열차고 영웅의 시대가 있었는가를 다소 참담하고 자괴스런 느낌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정돌이, 송귀철 씨가 현재의 삶을 이루게 된 데는 정경관에 머물고 숙식을 하면서 그 건너편 학생회관에 있었던 탈사랑우리회, 고대 농악대와 접촉하게 되면서이다.
그는 여기서 장구를 배웠고 지금은 장구 연주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송귀철이란 사람의 인생유전은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영화 ‘정돌이’는 민주화 투쟁과 정돌이의 성장 과정을 오가며 당시의 시대가 만들었던 역사적 정당성, 그 진심을 알리려 애쓴다.
정돌이는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으로 솟아올랐던 전국 시위에 형 누나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다. 한 인간의 정치의식이란 것이 사실은 (거대한 철학 이론에서가 아니라) 얼마나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산증인 같은 사례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영화 ‘정돌이’는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건 어쩌면 고대 운동권 학생들만의 얘기일 수 있고, 때문에 너무 특수한 얘기라는 취약성을 지니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봐서는 고려대가 아닌 다른 전국 대학의 운동권 출신들이 이 영화에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으며 그 차원을 넘어서서 1980년대의 한국 역사를 고려대라는 캠퍼스에만 가둬 놓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대현의 연출은 그 같은 약점을 잘 간파했던 듯이 보인다. 특수가 보편을 만들고 보편이 특수를 만든다는 변증 이론이 영화 곳곳에서 전개된다. 정돌이란 인물에서 당시 학생운동가들에 대한 인터뷰가 빈번하게 교차편집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돌이, 곧 송귀철은 자신의 기억으로 80년대를 증언하고 서정만, 김영남, 이윤경, 손병휘, 안태용, 양창욱, 노충관, 임혜숙, 이준영, 강신 등등 다양한 인터뷰어들은 각자 자신이 경험했던 당시 시대에 대한 ‘사회적’ 진술을 이어 나간다.
이들의 증언은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지점으로까지 확대된다. 정돌이는 사회의식화가 된 인물로 성장했으며(스스로도 중간에는 자신이 투사가 됐었다고 말한다)
운동권 학생들은 어느덧 늙고 평범한 중년들로 사회에 녹아들었다. 특수에서 보편으로 보편에서 특수로, 그럼으로써 영화는 그 시대에 대한 총체성을 이어 나간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연출의 고뇌는 충분히 평가할 가치가 높다.

미국의 1960년~1970년대도 뜨겁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학생운동가 톰 헤이든은 격렬한 청춘을 보냈지만 나중에는 제도권 변호사로 안착했으며 제리 루빈이나 에비 호프먼 같은 사회주의적 운동가, 무정부주의자들의 삶도 이후에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변질됐다. 할리우드는 그 얘기들을 숱한 극영화로 만들어 왔다.
아론 소킨의 ‘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7’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고대 학생 운동권의 이야기, 나아가 한국의 학생운동가들의 이야기, 더 나아가 한국의 민주화 투쟁의 이야기는 풍부한 드라마, 극영화로 선뜻 만들어 나가기가 힘이 든다.
사실과 진실의 규명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도 많으며 여전히 그에 대한 반동적이고 반민주적 행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 ‘정돌이’는 시의적절한 시기에 개봉이 됐다.
소수이긴 하지만 비교적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가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계엄령 소동 이후 서부지법을 침탈한 난동세력의 젊은이들 모습을 보면서 1980년대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때를 진실되게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는 언제든 환영받고, 공유되며 그럼으로써 새롭고 역사적인 ‘의식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정돌이’는 정돌이란 인물을 찾아서 긴 여정을 탐색하다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되짚어 가고, 지금과 같은 왜곡의 시대에 그때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프로퍼간다(선전선동)' 영화인 듯 보이지만 흔한 프로퍼간다 작품들과는 달리 인간미와 함께, 시대에 대한 진정성이 녹아 있다.
어쩔 수 없이 영화 ‘정돌이’에는 고인이 된 인물들에 대한 기억과 회고가 많이 이어진다.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故 김두황의 경우 강제징집, 곧 강제로 군에 입대한 후 사망을 했고 군에서는 자살로 처리했지만 수많은 의혹이 규명되지 않아 여전히 의문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영화 ‘정돌이’는 수많은 죽음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할애하고 있다.

미국의 노동운동가이자 기자였던 존 리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취재한 후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르포르타쥬를 썼고 1920년 내전에 휩싸인 혼란의 소련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얘기를 다룬 워렌 비티의 영화 ‘레드’는 오프닝에서 8,90대의 늙은 노인들, 부부들을 인터뷰 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실제로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 존 리드와 함께 미국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 “우리에게 그런 날들이 있었나? 그런 날들이 있었다고들 말들은 해? 우린 이제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영화 ‘정돌이’를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 영화 ‘레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에게 80년대가 있었던가.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희생됐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물론 그 시절이 몽땅 부정되고 있는 듯한 지금의 시대에 영화 ‘정돌이’는 우회적으로 그 정치적 망각을 질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금의 2,30대 젊은이들이 봐야 할 절실한 작품이지만 그것도 한편의 생각일 뿐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결코 안녕치 않은 것은 그때문이다.
지난 2월12일에 개봉됐으며 전국의 작은 극장을 순회하며 상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