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만큼 각축을 벌인 부문도 없었다. ‘맹크’의 게리 올드만에게 주자니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가 걸리고 홉킨스에게 주자니 그러면 또 지난해 대장암으로 아깝게 사망한 채드윅 보즈만은 어째야 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었던 참이다. 보즈만이 주연을 맡은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라는 작품 또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서 동정표가 몰리면 남우주연상은 그에게 돌아갈 확률이 크다고 봤다. 그러나 오래되고 고루한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그래도 될 거라고 봤다. 홉킨스는 고령이다. 그는 올해 87세다. 이번 수상은 아마도 그의 생애의 마지막 수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들도 고려됐을 것이다. 다 떠나서 작품의 완성도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결국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의 홉킨스에게 돌아갔다. 홉킨스가 ‘더 파더’에서 보인 치매 노인 연기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그의 이름이 사사로이 났던 것이 아님을 역력하게 증명하는 영화라는 얘기다. 지금껏 이런 치매 연기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 지금껏 이런 치매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설정이 특이하다. 지금까지의 치매
세상을 살면서 후회할 일은 많다. 지난 보궐선거에서 저질렀던 잘못된 선택? 미얀마 군부 학살을 규탄하는 성명서에 서명을 안한 일? 그런 것들과 동급까지는 아니어도 진짜 후회할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영화 ‘노바디’를 놓치는 일이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액션영화를 총 망라한 듯한 작품이다. 갖가지 요소를 다 비벼 넣었다는 그런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영화가 주는 쾌감이 극대화돼있다는 얘기다. 액션영화를 두고 누구는 너무 폭력적이라고 툴툴댄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주인공 허치(밥 오덴커크. 맞다. 당신은 이 배우를 모를 것이다. 하도 많은 영화에서 신 스틸러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배우의 진가를 드디어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나 장미나 늦게 피는 존재가 향이 오래가는 법이다)의 폭력은 후련하다 못해 통쾌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영화적 쾌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난 4월 7일 개봉된 영화 ‘노바디’의 현재 관객 수는 약 12만 명. 예전 같으면 수백만 명의 관객들이 환호했을 작품이다. 지금이라도 극장에서 이 영화로 덕지덕지 묻어 있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 보시기들 바란다. 영화 내용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1936~2011) 대통령이 유명했던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청바지를 입고 뒷 주머니에 시집을 꽂은 채 주말이면 공연을 보러 갔다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건 상당 부분 하벨이 대통령이 된 후에 윤색된 얘기이거나 그의 전기 영화에 쓸 요량으로 첨삭된 각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벨처럼 시인이나 극작가는 정치를 해서 비교적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는 있어도 그 역(逆)은 그리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정치라는 영역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끌어 들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는 얘기다.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인문학과 예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예술이 사라진 사회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인민에 봉사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다 한들 선전(宣傳), 선동(煽動)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벨이 체코의 벨벳혁명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늘 미완의 혁명이며 때문에 영구적으로 혁명을 수행해 나가야
세상에 못된 영화는 없다. 모두들 착한 영화이다. 못되 보이는 척, 사실은 그런 영화도 착하게 끝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선(善)을 지향하며 악당이 주인공이고 악이 승리하는 결말이어도 결국엔 그 지독한 현실을 벗어나자는 취지를 갖고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그것 역시 착한 영화가 된다. 극장가 한 편에서 조용히 개봉돼 상영 중인 (이 영화의 누적 관객 수는 현재 3000명이 되지 못했다) 론 쉐르픽 감독의 신작 ‘타인의 친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착해 빠진’ 영화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하다가도,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여전히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이에 배려와 친절이 사라진 지 오래다. 사회적 에티켓, 애티듀드(attitude)라고 규범화 돼있는 것도 역설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문을 닫게 하는 장벽 역할을 하게 한다. ‘여기까지만’ 들어와, 더 이상 깊이는 안돼 라는 식이다. 때문에 진심으로 상대에게 친절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더 나아가 상대의 친절을 알아채고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타인의 친절’은 바로 친절의 생리, 그 변증의 성찰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런 것
부동산은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다. 우연찮게도, 부동산 문제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비뚤어지게 만들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고 있는 ‘지금 이 시기’에, 영화 ‘노매드랜드’가 개봉을 앞두고 있어 눈길을 끈다. ‘노매드랜드’는 부동산 사태가 시발(始發)이 돼 삶의 모든 것이 뒤바뀐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좁게는 주인공 여성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이야기다. 펀의 일상은, 이름과 달리, 매우 유쾌스럽지 못하다. 그녀는 2010년을 전후해 집과 마을을 잃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덮치면서 그녀가 살던 도시 엠파이어 타운 역시, 이름과 달리, 제국의 빛을 상실했다. 완전히 유령도시가 됐다. 우편번호 자체가 없어졌다. 그 와중에 남편도 죽었다. 그녀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RV 한 대를 마련해 길을 떠난다. 길에서 먹고 자는 노매드의 삶을 선택한다. 펀은 슈퍼에서 물건을 사다가 만난 아이에게 말한다. 아이는 너무 힘들면(집이 없으면) 자신의 엄마 집에 와 있으라고 한다. “집이 없는 것과 거주지가 없는 것은 다르단다 얘야.”(I’m just houseless, not homeless.) 직역하면 하우스는 없지만 홈은 있다는
세상이 망하는 조짐은 극장가에서 나타난다. 두 가지 중의 하나다. 그다지 좋은 영화가 나오지 않거나 좋은 영화가 나와도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중국과 일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영화는 열린 사회에서 흥한다. 닫힌 사회에서는 절대로 영화가 잘될 수가 없다. 4세대 후이 안 감독부터 5세대의 장이모우와 첸카이거, 6세대의 로우예 등등까지, 그리고 지하전영의 지아장커가 있던 나라. 홍콩의 왕자웨이까지. 예술과 정치, 인생을 담아냈던 중국-홍콩 영화는 이제 온데 간데가 없다. 시진핑식의 변질된 사회주의 독재는 영화를 더 이상 영화가 되지 못하게 한다. 홍콩 시위에서 사복경찰(우리 식으로는 백골단)의 곤봉질을 당하고 목격한 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가수 정태춘이 종로에서 기자들을 기다리지 않는 것과 같다.(’92년 장마, 종로에서’)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베와 같은 극우 보수 정권이 50년 가까이 가는 나라(2010년 잠깐 민주당 간 나오토가 1년간 총리를 한 것을 제외하고)에서는 애니메이션 외의 영화는 거의 절멸 수준이다. 극장가가 팬더믹의 영향이 크긴 하지만 언제부턴가 다이나믹한 동력을 잃었다. 한국에서는 요즘 극장 영
극심한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적인 자해를 하게 한다. 고통이 심해지면 스스로 고립되고 은둔하려 한다. 당신들이 정말 내 고통을 알아? 내가 왜 이 고통을 당신들 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영화 ‘랜드’의 주인공 이디(로빈 라이트)가 딱 그런 심정이다. 그녀는 도심의 모든 일을 다 버리고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을 요량으로 (그녀는 일단 휴대폰을 길가 쓰레기통에 버린다.) 와이오밍의 산속 오두막을 매입해 거처를 옮긴다. 와이오밍하면 로키 산맥의 흉포(凶暴)한 자연을 생각하면 된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은 관광이라면 모를까 혼자서 생존해 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곳이다. 샤이언 족 같은 인디언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실제로 이곳엔 인디언의 후손들이 살아간다. 남한 면적의 2.5배 크기지만 인구는 58만 명에 불과한 곳이다. 이디는 사실, 그곳에 죽으러 간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고립돼있으면 서서히 죽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고통이 온전히 자신의 것만으로 치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위로하는 남들의 눈과 마음에서 다시 자신의 고통을 확인하는 것만큼 더욱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당연히 이디
놀랍게도, 영화는 종종, 시대의 변화를 예측한다. 세상에 대한 예지 능력을 선보인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광야를 떠돈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는 한국사회가 다시 개혁의 시대에서 수구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점친다. 영화감독들은 시대를 따지기 위해 흔히 과거로 날아가곤 하는데 이준익의 타임머신이 이번에 착지한 곳은 순조 1년, 곧 1801년이다. 정순대비(영조의 계비. 조선시대 중기는 영조-사도세자-정조-순조로 이어진다)가 어린 순조를 섭정했던 이때에는 선대(先代)인 정조가 이뤄 놨던 수많은 개화(開化)의 전조(前兆)들이 짓밟히던 때였다. 왕권을 뒤에서 쥐고 조종하던 정순대비의 세력들, 곧 노론들은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일종의 쇄국(鎖國)을 내세운다. 곧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통제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천주교는 사학(邪學)이라 주장하는데 조선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뤘던 주자학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대적인 탄압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투옥되고 참수된다. 닭띠 해인 신유년에 벌어진 일이라 해서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라 부르는 참사다. 이후 조선은
영화만큼 진실을 알리는 매체도 없다. 아니 영화가 유일하게 진실을 알리는 매체이다. 다만 그것이 조금 늦을 뿐이다. 영화는 언론과 달리 실시간으로 사건을 중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은 1991년 논란의 영화 'JFK'를 만들었다. 영화 'JFK'는 1963년 11월 텍사스 댈러스에서 암살당한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범인을 추적하는, 일종의 미스터리 드라마다. 35mm와 16mm, 슈퍼 8mm를 동원해 다큐멘터리 식으로 찍었으며 컬러와 흑백촬영을 동시에 하고 대규모의 장면전환과 별도의 시각처리가 동원된 올리버 스톤의 정치적 야심작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JFK'는 정치영화가 아니다. 철학적인 영화이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모르게 될 때까지 진실이 조작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사실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모르게 될 때까지 진실이 조작되는 과정은 고도의 음모집단이 언론과 함께 벌이는 일종의 군사첩보작전이다. 지난 2년간 우리 안에서 벌어진 소위 ‘조국 사태’와 지금 전개되고 있는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의 과정을 보면 오래 전의 사건인 JFK의 암살과 그걸 영화로
영화와 여성은 늘 조용한 혁명을 이루어 왔다. 이 둘은 때론 같이, 혹은 때로는 따로 세상의 금기를 깨뜨리는데 앞장서고 투쟁해 왔다. 여성을 해방시키는 나라는 영화와 창작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둘은 종종 무지하고 막지한 보수의 벽에 부딪히곤 한다. 영화 ‘암모나이트’는 그러한 반동(反動)의 시대를 겨냥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 프란시스 리는 두 여인의 섹스신을 강도높게 구사한다. 당연히 의도적이다. 프란시스 리는 보수화되고 있는 유럽사회에, 그리고 한국 사회에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 한다. ‘정말 아름다운 게 뭔지 보여줄까?’ 두 여인의 나신(裸身)은, 사람 간의 진짜 사랑은 성(性)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은 꼭 남자와 여자만이 사랑을 하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해준다. 신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자신이 남자든 여자든 그냥 상대인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을 것이다. ‘암모나이트’는 그 점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영화다. 이성애와 동성애가 무슨 차이람. 그 차이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담. 굳게 닫힌 듯 보이는 세상의 문은 영화 한편이 열어젖힌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로 슬며시. 그렇게 문 바깥의 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