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영화는 종종, 시대의 변화를 예측한다. 세상에 대한 예지 능력을 선보인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광야를 떠돈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는 한국사회가 다시 개혁의 시대에서 수구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점친다. 영화감독들은 시대를 따지기 위해 흔히 과거로 날아가곤 하는데 이준익의 타임머신이 이번에 착지한 곳은 순조 1년, 곧 1801년이다. 정순대비(영조의 계비. 조선시대 중기는 영조-사도세자-정조-순조로 이어진다)가 어린 순조를 섭정했던 이때에는 선대(先代)인 정조가 이뤄 놨던 수많은 개화(開化)의 전조(前兆)들이 짓밟히던 때였다. 왕권을 뒤에서 쥐고 조종하던 정순대비의 세력들, 곧 노론들은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일종의 쇄국(鎖國)을 내세운다. 곧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통제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천주교는 사학(邪學)이라 주장하는데 조선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뤘던 주자학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대적인 탄압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투옥되고 참수된다. 닭띠 해인 신유년에 벌어진 일이라 해서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라 부르는 참사다. 이후 조선은
영화만큼 진실을 알리는 매체도 없다. 아니 영화가 유일하게 진실을 알리는 매체이다. 다만 그것이 조금 늦을 뿐이다. 영화는 언론과 달리 실시간으로 사건을 중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은 1991년 논란의 영화 'JFK'를 만들었다. 영화 'JFK'는 1963년 11월 텍사스 댈러스에서 암살당한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범인을 추적하는, 일종의 미스터리 드라마다. 35mm와 16mm, 슈퍼 8mm를 동원해 다큐멘터리 식으로 찍었으며 컬러와 흑백촬영을 동시에 하고 대규모의 장면전환과 별도의 시각처리가 동원된 올리버 스톤의 정치적 야심작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JFK'는 정치영화가 아니다. 철학적인 영화이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모르게 될 때까지 진실이 조작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사실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모르게 될 때까지 진실이 조작되는 과정은 고도의 음모집단이 언론과 함께 벌이는 일종의 군사첩보작전이다. 지난 2년간 우리 안에서 벌어진 소위 ‘조국 사태’와 지금 전개되고 있는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의 과정을 보면 오래 전의 사건인 JFK의 암살과 그걸 영화로
영화와 여성은 늘 조용한 혁명을 이루어 왔다. 이 둘은 때론 같이, 혹은 때로는 따로 세상의 금기를 깨뜨리는데 앞장서고 투쟁해 왔다. 여성을 해방시키는 나라는 영화와 창작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둘은 종종 무지하고 막지한 보수의 벽에 부딪히곤 한다. 영화 ‘암모나이트’는 그러한 반동(反動)의 시대를 겨냥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 프란시스 리는 두 여인의 섹스신을 강도높게 구사한다. 당연히 의도적이다. 프란시스 리는 보수화되고 있는 유럽사회에, 그리고 한국 사회에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 한다. ‘정말 아름다운 게 뭔지 보여줄까?’ 두 여인의 나신(裸身)은, 사람 간의 진짜 사랑은 성(性)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은 꼭 남자와 여자만이 사랑을 하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해준다. 신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자신이 남자든 여자든 그냥 상대인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을 것이다. ‘암모나이트’는 그 점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영화다. 이성애와 동성애가 무슨 차이람. 그 차이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담. 굳게 닫힌 듯 보이는 세상의 문은 영화 한편이 열어젖힌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로 슬며시. 그렇게 문 바깥의 새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공포 그 자체이다. 환희나 기쁨 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길과 같다. 세계관이 바뀌는 일이다. 무섭고 두려워진다.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는 안 그렇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공포영화의 작법이 어울린다. 공포영화가 꼭 진실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영화는 공포영화다.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알게 된 후 스파이로 변신하는 부부의 이야기, 그 어둠과 두려움의 이야기인 ‘스파이의 아내’를 공포영화의 대가(大家)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만든 이유다. 그게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첩보 스릴러보다는 심리 스릴러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그녀는 나를 밀고할 것인가. 그녀가 나를 밀고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그녀가 알게 됐고, 그렇게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식의 반복되고 중첩되는 배신과 의심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세상의 모든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사람의 마음 속 우물도 깊이를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제목대로라면 전도가 양양한 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 곧 학계나 비즈니스 쪽에서 꽤나 잘 나가고 있는, 성공 스토리쯤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일종의 엽기 스릴러인데다 이야기가 완전히 예측불가능한 쪽으로 움직인다. 매우 새로운 영화이다. 여성감독의 영화이고 여성이 주인공이며, 여성 문제가 앞세워진, 파격적인 페미니스트 영화다. 요즘엔 영화고 어디고 여성이 대세다. 여성주의가 시대를 주도한다. 남성이 주도하던 시대가 파산했음을 보여주고 폐기돼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인공인 카산드라는 낮과 밤이 다른 여자이다. 낮에는 친구 게일(래번 콕스)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점원으로 일을 한다. 꽤나 외모가 눈에 띈다. 그래서 카페 점원을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집도 꽤 잘 사는 편 정도가 아니라 부유한 편이다. 먹고 살 걱정은 없어 보인다. 아빠는 내색하는 편이 아니지만 적어도 엄마는 늘 카산드라가 걱정이다. 딸이 너무 허송세월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낮에는 설렁설렁 무위도식하듯 살아가는 카산드라는 알고 보니 7년 전에는 아주 똑똑한 의대생이었다. 우리 식으로는 예과 2년을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때려치웠
영화는 제목 하나로 비교적 모든 것을 추출할 수 있게 한다. 영화 ‘미나리’를 두고 사람들은 왜 ‘미나리’냐고 묻는다. 물론 미나리(를 심고 기르고 캐고 하는 등등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보다는 미나리가 상징하고 은유하는 내용의 영화일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영화에서 장모인 순자(윤여정)는 사위 제이콥(스티븐 연)과 별다른 상의 없이 손자 데이빗(앨런 S. 김)을 데리고 나가 미나리를 심는다. 집에서 좀 떨어진 냇가다. 순자는 데이빗에게 “여기가 미나리 심기에 딱 좋은 데네.”라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종자를 뿌린다. 미나리는 그렇게 뿌리기만 하면 스스로 알아서 크는 작물이다. 요즘에야 미나리가 숙취 해소에 꽤나 좋은 것쯤으로 다 알고 있지만 옛날 사람들에겐 잔병에 안 걸리게 하고, 무조건 여기저기 건강에 좋고, 그래서 오래오래 살 수 있게 해주는, 만병통치의 나물로 인식돼 왔다. 향은 강하고 독특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약과 같은 나물로 취급받았다. 무엇보다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나물이라는 점이 좋았을 것이다. 할머니 순자는 그렇게, 미국 땅 아칸소에 미나리 씨를 뿌리면서 손자 데이빗이 미나리처럼 쑥쑥 아프지 않게 자라기를 바라는 소망을
일본 최고의 로맨틱 가이 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신작 ‘라스트 레터’는 그의 전작(前作)인 ‘러브 레터’를 보지 못한 신세대 관객들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극 중 인물들이 (시대가 어느 때라고) 매일같이 ‘손편지’를 주고받는 내용이어서 ‘꼰대 영화’라는 소리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의 전작(全作)을 대체로 봐왔던 사람들, 특히 ‘뱀파이어’(2011)나 ‘립 반 윙클의 신부’(2016)까지 봐왔던 사람들은 ‘라스트 레터’가 결코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작품들을 넘어 이와이 슌지 자체를, 그래서 흔히들 ‘이와이 월드’란 말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번 새 영화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숨은 그림을 찾아보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가장 쏠쏠한 맛이다. 복잡한 척 하지만 ‘라스트 레터’는 사실 그리 복잡한 내용이 아니다. 앞뒤, 그리고 중간중간 시간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고, 주인공 토노 유리(마츠 다카코)의 시어머니가 늙으막에 연애를 하다 허리를 삐긋한다든지, 극중에서 소설가로 나오는 오토사카 쿄시로(후쿠야마 마사하루)가 그의 이전 여자 토노 미사키의 옛집을 찾아 가 그녀의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앞선 부모들이 늘 그렇게 말씀하시며 살았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었던 세대였던 만큼 하루하루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눈앞에서 코 베어가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기대했던 삶의 해결방식은 양심이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원. 근데 그 기준은 늘 애매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해결하는 게 다였다. 상식은 기준이 없다. 원칙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 ‘상식’으로 분쟁이 해결될 때가 적지 않았다. 일종의 ‘무질서의 질서’인 셈이다. 지금은 오히려 ‘질서의 무질서’의 행태들이 넘쳐 나고 있지만. 영화평론가인 만큼 이번 달은 영화 얘기를 두어 편 하겠다. 하드 보일드 작가로 유명한 미국 보스톤의데니스루헤인은 지금까지 연인 탐정 ‘켄지&제나로’ 시리즈를 딱 5권만 썼는데 그중 꽤나 유명한 작품이 '가라 아이야 가라, Gone baby gone' 이고 2007년 배우 벤 에플렉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주인공 패트릭켄지 역은 케이시에플렉이, 앤지 제나로는 미셸 모나한이 했다. 이 소설과 영화의 핵심은 4살짜리 아이 아만다의 유괴범을 잡는 일인데 처음엔 미해결로 보였던 (그래서 아이가 이미 사망한 것으로 종결처리된) 사건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돈? 권력? 종교? 법? 뜻밖의 공포영화 ‘모츄어리 컬렉션’을 보면 그건 모두 아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스토리다. 이야기이다. 남들의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이야기, 그래서 스스로를 바꾸고, 남들을 바꾸고, 결국은 세상까지 바꿀 수 있는 이야기. 스토리야말로 진정한 힘의 원천이다. ‘모츄어리 컬렉션’은 공포영화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오히려 다 저지르고 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무섭지 않다. 그다지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다만 표현 수위가 나름 높다는 것뿐인데 그 정도는 공포보다는 쾌감의 수준이다. 공포영화가 가장 공포스러울 때는 무섭지 않을 때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그런 불문율도 이 영화에서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반면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로 진행된다. 그것이야말로 ‘모츄어리 컬렉션’의 특징이다. 이 영화의 골조는 기본적으로는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옴니버스 형식이다. 짧은 이야기가 잇따라 이어지며 그 얘기
3대가 모인 가족 조찬에서 할머니인 릴리(수잔 서랜든)와 손자인 조나단(앤슨 분)의 대화가 흥미롭다. 손자가 묻는다. “할머니는 내게 줄 유산이 많아요?” 릴리의 대답이 걸작이다. “내가 주는 돈을 매춘부와 마약 사는데 쓴다고 약속하면 네게 주마.” 가족들 모두 왁자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할머니는 우드스탁 세대, 곧 히피 세대다. 손자는 래퍼들의 세대이고. 그 세대간 간격을 ‘불경한(?)’ 농담으로 해소한다. 할머니 릴리는 자신과 같은 세대이자 오랜 친구이고 남편의 사실상 연인이기도 한 리즈(린제이 던컨)와 해변을 거닐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집안에 레즈비언 한 명 정도는 있어야 좋지. 안그래?” 릴리의 둘째 딸 안나(미아 와시코우스카)는 게이다. 그녀는 이번 주말 자신의 파트너인 크리스(벡스 테일러 크라우스)와 함께 엄마 집을 찾았다. 가족 간의 대화가 이 정도로 자유스러우면 좋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적 상상력만으로라도 이런 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유머와 풍자를 잃고 비뚤어진 종교적 신념과 위선적인 순결주의, 기계적인 양성 평등주의와 역사적 순혈주의만을 강조하느라 경화(硬化)된 사회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 지금의 한국사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