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에 왕가위의 2000년작 ‘화양연화’가 관객 10만 명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역설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세상에 일정한 환멸을 느끼고 있으며 왕가위 식 탐미주의에의 탐닉을 탐욕스럽게 갈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다이즘도 1차 대전 끝의 황량함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나왔다. 지난 4년 간 극우 반동의 광기에 지친 사람들이 이제 쉴 곳이 필요하다고 소리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첸 여사(장만옥)와 차오(양조위)의 이어질 듯 말 듯하는 불륜의 일탈처럼, 지금의 사람들은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을 관조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영화 ‘화양연화’처럼 정치적인 기호로 가득한 작품도 드물다. 이 영화는 스러져 가는 홍콩의 영화(榮華)에 대한, 그렇게 배신의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왕가위 식의 애처로운 송가(頌歌)이다. 홍콩의, 홍콩에서의, 홍콩을 위한 세상과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그 같은 사랑과 애정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을 거라는 좌절이 담겨져 있다. 그런 정서의 기조(基調)는 왕가위의 또 다른 작품들인 ‘타
역사는 일상 속에서 반복된다. 2011년 어느 초여름쯤 서울 한남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상을 엎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이 있다. 10년이 된 얘기지만 40대 후반의 나이였을 때니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기억하기로는 그 자리에 꽤나 스노비시(snobbish)한 인간들이 모였었는데 건축가 변호사 방송인 패셔니스타 시인 등등이 있었을 것이다. 장소도 한남동 유엔빌리지 근처였다. 비교적 여유가 넘쳐나던 분위기였던 건 불문(不問)이 가지(可知)다. 자연스럽게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이, 무상급식을 놓고 벌인 정치 도박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됐다. 그중 여자 시인의 말이 화근이 됐다. 그녀가 말했다. “왜 내가 낸 세금으로 강남 집 애들까지도 공짜로 밥을 먹여야 해? 미친 거 아냐?”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없었던 탓에 말을 더듬었고 그런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걸 만회한다며 한 짓이 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뛰쳐 나오고 말았다.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랬어야 옳았다. 제 정신으로 차분하게. “그럼 한줌도 안되는 강남집 애들 공짜로 밥 먹이는 게 겁이 나서, 대다수 없는 애들, 가뜩이나 못먹는 애들까지 다 굶겨?! 꼭 그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이 말을 정치비평에 적용하면 이렇다. 정치평론가들은 숱하게 정치판을 분석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눈꼽만큼도 그러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종편과 유튜버 등 온갖 미디어에서 난무하는 정치비평이 요즘엔 약보다 독이다. 대다수가 윤석렬이 해임에 버금가는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틀렸다. 추미애는 사퇴하지 않을 것이며 혹은 대통령이 사의를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틀렸다. 죄 틀린다. 그때마다 대중들이 갖게 되는 실망과 좌절감이 얼마 만한 것인지 그들이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내 대중들은 한때 개돼지 취급을 받은 적이 있어, 상당히 똑똑해졌다. 그런 만큼 꽤나 흔들리기도 잘한다. 대중들은 더 이상의 분석보다는 행동의 지침을 요구한다. 행동하는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문학이 종종 고전을 찾듯이 정치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어땠는지를 보면 된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지금의 사회 개혁이 행동주의적 측면에서 당시의 사회주의 혁명의 단초를 모방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는 더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