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희의 청강을 거부하는 스에마쓰 야스카즈 쓰다 소키치와 이케우치 히로시는 이병도가 와세다대를 졸업한 후에도 자신들의 저서와 논문을 보내주었다. 이병도는 남한 강단사학계의 이른바 태두가 된 후에도 이 일본인 학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였다”고 높였다(본 연재 7월 20일자 참조) 또한 경성제대 교수이자 조선사편수회 간사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해방 후에도 한국을 들락거리면서 서울대 교수들을 지도했으며(27일자 참조) 한국인 제자들에게 이렇게 친절했던 식민사학자지만 재일 사학자 이진희(李進熙:1929~2012) 교수가 자서전 ‘해협’에서 말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주 다르다. 이진희는 1950년 메이지(明治)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는데, 6·25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53년 도쿄예술대학 교수인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케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조선고고학’을 강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학습원대학(學習院大學)의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도쿄대학에서 ‘여말선초(麗末鮮初:고려말 조선초)’라는 제목으로 강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진희는 후지타 료사쿠의 ‘조선고고학’을 듣기 위해서 후지타의 친구인 고토 슈이
* 제국주의 역사학을 반성했던 일본 사학자들 전 호에서 사례를 들었지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 대한 남한 강단사학자들의 존경심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 중에서도 조선총독부 직속 조선사편수회 간사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1904~1992)에 대한 존경심은 남다르다. 광복 후에도 서울대 사학과를 들락거리면서 교수들을 지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1927년 도쿄제대를 나와서 조선사편수회 간사가 된 스에마쓰는 1933년에는 경성제대 조교수를 겸임했다. 한 해 전에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하던 경성제대 교수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자 그 자리를 꿰찬 것이다. 스에마쓰는 조선총독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편찬하던 <조선사> 편찬사업을 주도했고, 이런 공을 인정받아 1939년에는 경성제대 교수로 승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반성의 기운이 일었다. 일본의 역사학이 침략전쟁의 도구로 전락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제국주의 역사학을 황국사관(皇國史觀)이라고도 하는데, 대표적인 이론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평양설’과 서기 369년 고대 야마토왜(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