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조선왕조 천주교 신유박해(1801년) 사건 때 정약용 선생은 일가족이 천주교에 연루되어 집안은 풍지박산이 되고, 정약용 선생은 전남 강진에 유배를 간다. 그 곳에서 선생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열정을 학문으로 승화시키게 된다. 지방 수령과 목민관이 지켜야 할 올바른 마음과 몸 가짐의 자세, 업무지침에 관련된 내용의 '목민심서'를 1818년에 지었다. 이 책에서는 12 편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필자는 목민관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규율인 ‘율기(律己)’에 관심이 있다. 먼저 바른 몸가짐(칙궁(飭躬), 청렴한 마음(淸心), 집안을 다스림(齊家), 청탁을 물리침(屛客), 씀씀이를 절약함(節用), 절약한 자금으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樂施)으로의 내용이다. 또 '목민심서'의 서문에 보면 선생의 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지위가 낮은 아랫 사람들은 여위고 병들어 줄지어 굶어죽은 시체가 구덩이를 메우지만, 다스린다는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위 서문과 같이
세상에는 모든 생물들이 제자리에서 각기 제 역할을 하며 존재하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도 어김없이 운행되고 있다. 묵묵히 그들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있으며, 따뜻한 태양 아래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맞게 지금까지 살아왔었다. 나아가 사람들은 집단과 사회를 구성하며 서로 영향을 주며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하여 우리는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규칙과 법을 제정하여 이 틀과 관계망 속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서로 행복하게 지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질서가 있는 사회를 이끌어가며 통치하려는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덕(德)이 없든가 잘못을 저질렸을 때는 커다란 혼란과 손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의 시민들이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를 ‘비상계엄’이라는 괴물을 통해 파괴하였으며 대한민국의 국격을 크게 훼손하였다. 이에 대해 대처하는 법을 동양고전에서 찾아보자. 『논어』에서 공자는 정치의 요체에 대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고 강조하셨다. 또 “시민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는 존립하지 못한다(民無信不立)‘고 하였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 윤석열 대통령은 불법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국회는 즉시 다음날 비상계엄을 해제결의하였다. 그리고 14일 윤석열을 탄핵의결하였다. 윤석열은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윤석열의 망상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왜 이런 망상에 빠져들게 되었을까? 과대망상(誇大妄想)이란 '사실보다 지나치게 부풀려서 하는 터무니 없는 헛된 생각'을 말한다. 윤석열이 이런 망상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편향된 사회화과정(Socialization)에 단초가 있다. 사람의 성격은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까지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 경험하게 되는 직장생활의 재사회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된다. 윤석열은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는 이렇게 그의 성품을 말하고 있다. '재능이 없고 성실하지 않으며, 교칙에 순응하지 않고 고집이 세며 고자세이다. 또한 꾸지람하면 오만불손하며 급우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현재 윤석열의 퍼스낼리티와 오버랩이 된다. 부친 윤기중씨는 아들의 이러한 성품을 근심하여 절친한 친구에게 훗날 내 아들이 잘못할 때에 올바르게 인도하여 줄 것을
국제정세는 날로 격화되고 있다. 아울러 동아시아 국가의 군비증강과 전쟁 위협의 불안이 점차 가중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처 방법을 고려시대 서희(徐熙) 외교전략에서 그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국가 간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요체이다.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하자 916년 북방의 유목민족을 통일한 거란(契丹)이 일어났다.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989년에는 송(宋)을 제압했으며, 991년에는 여진을 공략해서 압록강 하구를 차지하였다. 이곳은 거란의 고려침입 때 교두보가 되었다. 고려 성종 12년(993년) 거란의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공했다. 거란은 고려가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에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 땅을 거란에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과 항복론이 대두되었지만 서희는 “우리 영토를 적에게 떼어주는 것은 만세의 치욕이 될 것이고, 신(서희) 등으로 적과 더불어 한번 싸우게 한 뒤에 다시 논의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성종은 서희를 거란의 소손녕에게 회담의 대표
학문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어떻게 세상을 변모시키는가? 조선시대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은 영남 성리학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1501년생)였고 퇴계는 경상좌도를 남명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일생 동안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서로 상대방의 학문을 인정하고 인격을 존중하였다. 조선 중기의 학문(성리학)의 라이벌이었다. 남명이 53세(1553년) 때, 그의 학문을 인정한 퇴계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에 임명된 남명에게 벼슬을 하라고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에 남명은 자신이 벼슬을 할 만한 덕(德)이 없음을 들어 관직에 나갈 마음이 없음을 전한다. 남명이 단성현감에 임명을 받고 이를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다. “왕대비(王大妃)인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명종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외롭고 어린 고아(孤兒)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民心)을 어떻게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라는 내용이다. 명종께서 남명을 처벌하려고 했으나, 조정 신하들의 만류로 남명은 무사하였다. 그렇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올린 강직한 내용의 사직소(辭職疏)는 전국 유림의 마음을 통쾌하게
금년 8월에 무더위가 한창일 때, 언론에서는 ‘건국절’과 ‘뉴라이트’, ‘친일파’와 ‘밀정’이 회자되었다. 일제식민지 시대 “한국민의 국적이 일본이었다” 라고 버젓이 말하는 지도자를 바라보면서 일제 강점기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세 여성들을 생각해 본다. 먼저 석주 이상룡 애국지사의 손주며느리 허은과 이회영 애국지사의 부인 이은숙이다.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와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910년 8월 29일 불법과 강요되었던 일한병탄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나라가 없어져 수많은 국민들은 토지를 빼앗겼으며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폭압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남자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칼을 들고 항일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아울러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향의 전답과 종가집을 헐값에 팔았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땅으로 이주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인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만주와 서간도에 정착하여 그동안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였다. 시부모와 자녀의 생계는 물론 찾아오는 애국지사와 손님들까지 모든 수발을 책임져야 했다. 낯설고 광활한 땅에서 신흥무관학교, 경학사, 부민단
전남 강진 읍내에 가면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유배를 왔을 때 묵었던 주막이 초가집으로 복원되어 있다. 1801년 12월 엄동설한에 40세의 다산 선생은 이곳 시장 골목에 있는 초라한 주막에 도착했고, 이때 늙은 주모가 건넨 밥 한 그릇을 먹고 차가운 냉방에서 유배 첫 날을 보냈던 집이 사의재(四宜齋)이다. 다산 선생은 정조대왕의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동부승지와 형조참의라는 당상관직의 높은 벼슬에 재직하다가 하루아침에 옥에 갇히는 죄수가 되었다. 다행히 감형이 되어 이곳 강진에 유배를 오게 되었다. 함께 구속되어 심문을 받았던 정약전 둘째 형은 흑산도로 귀양을 가고, 정약종 셋째 형과 매부인 이승훈은 사형을 당하는 등 한 가문이 일시에 폐족(廢族)이 되었다. 이러한 엄혹한 여건 속에서도 다산 선생은 새롭게 마음을 다잡아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그 좌우명으로 다산 선생은 네 가지 덕목을 실천하기로 작정하였다. 첫째, 생각은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하고, 둘째, 외모는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하고, 셋째, 말은 과묵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넷째, 행동은 무거워야
한국에 찾아오는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자연환경과 4계절의 뚜렷함에 모두가 부러워하고 있다. 꽃이 만발하는 포근한 봄, 신록이 무성한 여름, 풍성한 수확의 계절인 가을, 차가운 눈바람과 함께 맨몸을 드러내는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우리는 4계절의 운행과 변하지 않는 규칙성을 발견하곤 한다. 게다가 가까이 있는 도시 주변의 산들은 우리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언제나 제공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4계절에 변화에 맞추어 한국인은 계절의 특성에 알맞게 의식주를 계발하며 생활화하여 왔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나무와 흙으로 한옥을 짓고 여름 장마비의 습기를 줄이기 위해 대청과 누마루를 만들었다, 한옥의 시원함은 이러한 장치 이외에도 집 뒤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찬 기운이 마당의 더운 기운과 어울려 대류현상에 그 원인이 있다. 뿐만아니라 음식과 옷에서도 우리들은 독창적인 디자인과 재질로 한국적인 아름다음을 이루어 내었다. 오늘날 한류문화의 중심에는 한국의 다양한 음식과 독특한 먹거리도 포함된다. 나아가 추운 겨울을 이기기 위해서는 따뜻한 온돌방을 만들었다. 이처럼 한국인들의 생활문화가 4계절의 영향으로 인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날이 갈수록 한국을
지금 정치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5월 30일 제22대 국회가 출범한 이후 개원구성부터 여야가 대치하여 정치의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당면한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국론을 통일하기 위한 정치리더십의 출현이 절실하다.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일제의 국권침탈기에 주로 활동하였던 탁월한 독립운동가요 혁명가이다. 그는 여러+정파의 의견을 아우르고 합의된 공론을 형성하고 문제해결의 대안을 제시하는데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 예로는 1919년 9월 11일 상해에서 도산의 노력으로 통합임시정부가 탄생되었을 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이후 각 지역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그중에 노령 대한국민의회(3.17), 상해임시정부(4.11), 한성정부(4.23)가 대표적이다. 도산은 노령 국민의회의 세력, 한성정부의 명분, 그리고 상해임정의 현실성을 기반으로 하여 3두정치론을 제기하면서 이들을 조정하였다. 한성정부가 국민대회를 거쳐 성립하였으므로 한성정부안을 바탕으로 하여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를 발족하였다. 다른 정파의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외적으로 외국 정부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단일 임사정부로 표방하게 되었다
지난 5월 13일 단행된 검사장급 이상 39명에 대한 검찰간부 인사는 매우 이례적이다. 김건희 여사 수사 문제가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수사팀 지휘 라인을 모두 바꾸었기 때문이다. 검찰내부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이를 심상치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명품 백 수수,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의혹 등 김여사 관련 수사를 지휘해 왔던 송경호 중앙지검장을 부산고검장으로 승진 발령하고, 중앙지검의 1. 2. 3. 4 차장 전원을 교체해 검찰총장을 식물총장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주요 수사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며, 5월 11일 박성재 법무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검찰 고위급 인사를 늦춰달라고 요청했지만 장관은 이를 묵살했다. 검찰청법(제34조)에는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검사의 보직을 제청한다”고 되어 있다. 이 내용은 검찰총장의 의견을 반영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검창총장의 의견을 듣지 않고 행한 인사를 적법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검찰간부 인사는 이원석 총장의 의지와는 다르게 법무부 장관의 일방적인 인사 전횡에 가까웠다. 앞으로 김건희 여사 관련 수사가 제대로 진행될지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수사를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