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문턱은 삭막하다. 겨울엔 모든 것들이 동면에 들어간다. 나무는 가지를 벗고 맨몸으로 칼바람을 맞이할 태세를 갖춘다. 어찌 나무뿐이랴. 어린 시절 가난한 내 이웃들도 겨울 문턱엔 저마다 허둥거렸다. 겨울은 두려웠고 겨울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행여 먹을거리가 모자라지 많을까. 행여 추위에 떨 내 새끼들에게 무엇을 입힐까? 사람들은 허름한 장롱문을 열고 겨울 준비를 서둘렀다. 이미 바람결이 선뜻해진 겨울 문턱에서 너나없이 들판에 나서 한 톨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 가을 추수에 땀 흘렸다. 어린 나는 그런 겨울을 기다렸다. 겨울에는 눈이 오기 때문이다. 얼음 위에서 뒹굴고 놀기 좋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내 첫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삭막한 겨울 아침 집 뒤란의 대숲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와 참새 소리도 기다려졌다. 그러나 나에게 겨울은 춥고 배고팠다. 그런데도 나의 겨울은 이상하게 설렘을 안겨주었다. 나에게 겨울은 기다림의 계절이었다. 추위 속에서도 얼음이 풀리고 봄이 온다는 희망의 계절이었다. 겨울이 있기에 봄이 오기 마련이니까…. 우리의 생인들 무엇이 다를까? 나의 어린 시절은 차가운 빙점이었다. 춘궁기가 있던 내가 자란 합천 골짝은 겨울이 너무나 가혹
합천 땅에 내린 건 해질녘이었다. 노모가 계신 집은 합천읍에서도 한 시간 남짓 걸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모처럼 지는 해를 보며 남정강을 건너 걸어가기로 했다. 읍내를 벗어나자 보리밭이 보였다. 해거름 밭둑 길을 쉼 없이 걸었다. 보리밭을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어릴 적 나는 이렇게 보리밭 길을 따라서 시골 초등학교를 다녔다. 간혹 친구들을 만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늘 섬뜩한 두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였다. 우는 아이 소리 같기도 한, 밤하늘을 흔드는 늑대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늑대를 두고 소문도 흉흉하였다. 어느 동네에선 늑대가 갓난아기를 물고 갔다는 둥, 자고 나면 늑대가 돼지우리를 덮쳐 새끼돼지를 물고 갔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면 혼자 삽짝 밖을 나서지 못했다. 어쩌다 이웃 동네 친구를 만날 일이 생기면 동네 아이들을 불러내어 무리를 지어 보리밭 고랑을 지나다녔다. 푸른 달빛 아래 보리밭 밭둑을 걷는 기분이라니…. 달빛 속의 밭고랑에서 불쑥 늑대가 나타날 것만 같은 공포에 우리는 절로 오금이 저렸다. 그런 늑대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고 한다
걷기가 몸에 좋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다. 그러나 도회지에서, 특히 서울에서 걷기운동은 사실 좀 어렵다. 우선 공기가 안 좋아 매연 속을 쉽게 걸을 마음이 안 생긴다. 그보다 더 어려운 건 우리 몸은 편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표면에 닿는 면적이 넓을수록 편안함을 느낀다. 서 있는 것보다 엉덩이를 걸치는 것이 편하고, 그보다 좀 더 편한 자세는 반쯤 몸을 누이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다. 그보다 더 편한 자세는 말할 것도 없이 자리에 삐딱하게 눕는 것이다. 결국, 가장 평안을 느끼는 자세는 눈감고 숨 안 쉬는 죽음의 세계다. 죽지 않으려면, 병들지 않으려면 사람은 움직여 줘야 한다. 원시사회는 물론 농경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부단히 육체노동을 했다.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사람의 손발 대신 그 자리를 기계가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편한 것을 좇게 되었다. 그러나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는 우유를 받아먹은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훨씬 더 건강하다. 그만큼 발로 뛰기 때문이다. 발로 걸으면 우선 온몸에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발끝에서 두뇌까지 온 세포를 다 활성화시킨다. 디스크 환자도 걸으면 낫는다. 골다공증도 걷기운동을 규칙적으로 해
높은 담벼락을 세운 저택이 있었다. 주인은 그 담벼락 때문에 주야장천 신경이 곤두서 있다. 심심하면 사람들이 그곳에 애완견을 데려와 오줌을 누이거나 한밤엔 취객들이 실례를 하고 갔다. 오물 냄새가 등천을 했다. 그래서 담벼락에 경고문을 썼다. ‘이곳에 오줌 싸지 마시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몰래 실례를 더 저질렀다. 그는 성질을 못 이겨 파출소에 전화를 했다. 파출소장이 와서 보고 한마디 했다. “그러지 말고 저 담벼락 경고문을 ‘니 맘대로 싸시오!’라고 고치시오. 왜냐? 사람의 심리란 하지 말라면 더 하는 성질이 있소. 틀림없이 똥오줌 냄새가 덜 할 것이오.” 듣고 보니 그럴싸한 얘기였다. 주인은 담벼락에 이렇게 썼다. “니 맘대로 싸시오!” 그다음 날부터였다. 예상은 적중하지 못했다. 그걸 본 마을 주민들이 너나없이 그곳에 개를 데리고 와서 똥오줌을 내갈겼다. 이를 본 주인 남자가 펄펄 뛰면서 미친개처럼 설쳐댔다. “왜 싸! 여기가 개 오줌 싸는 곳이야!” 그러자 개를 끌고 온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 당신 손으로 니 맘대로 싸라면서? 그러니까 맘대로 싸는 거 아니오.” 주인 남자는 억장이 터져 울먹거리며 하소연을 했다. “이것 보시오. 이는 파출소
도서출판 미담길 대표 어느 날 염라대왕 앞으로 저승사자가 여자 세 명을 데리고 왔다. 염라대왕이 첫 번째 여자에게 물었다. “너는 뭘 하다가 죽었느냐?” 간호사가 대답했다. “예, 저는 시립병원에서 가난하고 돈 없는 백성들과 외롭고 병 든 노인들을 평생 돌보다가 죽었어요.” 염라대왕이 말했다. “그럼 너는 천국으로 가거라.” 두 번째 여자가 염라대왕께 고했다. “예, 저는 선교 활동하는 의사 선생님을 따라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갔어요. 저는 그곳에서 무지하고 몽매한 토인들을 죽을 때까지 돌보다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했다. “오, 그래. 너도 천국으로 가거라.” 저승사자가 세 번째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너는 이승에서 뭘 하다가 왔느냐?” “예, 저는 다락방에서 운영하는 돌팔이 의사 밑에서 돌팔이 간호사로 일하다가 그만 병이 걸려 죽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명했다. “너도 천국으로 가거라.” 세 번째 여자는 감격해서 말했다. “어머나 세상에. 나 같은 돌팔이 간호사도 천국으로 갈 수 있네.” 그 말에 염라대왕은 “근데 너는 천국에서 사흘만 있다가 오너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살다가 한 번쯤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하늘이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 중에 흔히 쓰는 말이 ‘죽겠다’는 소리다. 아프면 아파서 죽겠다, 좋으면 좋아서 죽겠다. 웃기면 웃겨서 죽겠다, 심심하면 심심해서 죽겠다. 배부르면 배 터져서 죽겠다, 성질나면 화가 나서 죽겠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그냥 콱 죽어버리겠다.’ 이래도 죽겠다, 저래도 죽겠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말 스스로 죽는 사람도 있다. 세상천지 만물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지인 중에 한 무명작가가 있었다. 그는 평생 글을 써서 발표했지만 이렇다 할 작품 하나 남기지 못했다. 남들 다 타는 문학상 하나도 받지 못한 지질히도 문(文)복이 없을뿐더러 가난하기도 이를 데 없었다. 그는 결국 죽기로 작정을 했다. 한데, 막상 죽으려니 죽을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어느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살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여. 그래서 그만 죽기로 작정을 했네.” 전화를 받은 시인이 흔쾌히 응답했다. “그 참 좋은 생각이네. 솔직히 자네 같은 어벙이 무명작가는 죽는 게 나아. 어디서 어떻게 죽기로 했나?” “그냥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기로 했네.” “이 겨울에? 얼음이 얼어 제대
어느 마을에 큰돈을 번 부자(富者)가 살고 있었다. 그는 외동아들 하나를 두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이는 나이가 듦에 따라 버릇이 고약해졌다. 오직 자기만 알고 한번 고집을 부리면 성질을 꺾을 줄을 몰랐다. 그 위에 가난한 집 아이들을 함부로 때리고 없는 집 자식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아이의 나이 열일곱 살이 되었다. 부자는 그렇게 자라는 아들이 심히 염려가 되었다. 그는 어느 날 가까운 산에서 도를 닦고 있는 현자(賢者)를 찾아갔다. 그는 아들 얘기를 하면서 현자에게 당부를 했다. “부디 제 아들의 나쁜 버릇을 고쳐 주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현자가 부자에게 말했다. “내일 모레 내가 댁을 찾아가리다. 그때 그 아이를 보여주시오.” 부자(富者)는 그날 아이가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일부러 잡아두었다. 저녁나절 약속했던 현자가 내려왔다. 현자는 아이를 불러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뒤뜰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현자는 아이에게 지금 막 싹이 튼 한 식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손으로 저 나무를 뽑아 보아라.” 아이는 엄지와 검지 하나로 냉큼 어린나무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현자는 조금 큰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 나무를 뽑아 보렴.” 아이
술로 인생을 망친 사내는 생각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났겠다’고. 그는 산중에 들어가 목을 매달았지만, 그만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엉덩이에 멍만 들었다. 이번엔 목을 매는 대신에 산꼭대기 벼랑 끝에 가서 뛰어내리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절벽을 내려다보니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게 차마 용기가 안 났다. 그래도 죽어야 한다고 눈을 질끈 감고 막 몸을 던지려는데 뒤에서 피리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영화에서나 보았던 하얀 도포 자락에 상투를 튼 허연 수염의 도인이 바위 위에 앉아서 피리를 불고 있는 게 아닌가. 말로만 듣던 이슬만 먹고 산다는 도인이었다. 피리를 불고 있던 도인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신가?” “예, 방금 저 아래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으려던 인생 낙오잡니다.” “그럼 뛰어내려 죽지 않고 왜 여길 왔는고?” “도인께서 저에게 살길을 일러 주십시오.” “도대체 그대의 가장 큰 근심 걱정이 뭣인고?” “술입니다. 하도 인생사가 안 풀려 알코올에 젖어 삽니다. 우선 술버릇부터 고쳐야겠습니다. 하루도 술 없이는 못 사니 이걸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방법이야 있지.” 사내는 간절하게 청했다. “그렇습니까? 그 방법 좀 가르쳐주십시오.” “
한 어부가 해변의 나무 그늘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돈 많은 사장이 놀고 있는 어부를 보았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어부에게 물었다. “어부면 고기를 잡아야지 이렇게 놀고먹어도 돼?” 그러자 어부가 시부저기 말했다. “걱정 마십쇼. 오늘 먹을 고기는 잡았으니까, 히히.” “이런 오늘 먹을 고기만 잡아서 쓰나. 더 많은 고기를 잡아야지.” “잡아서 엇다 쓰게요?” 사업가는 더욱 복장이 터져 말했다. “엇다 쓰기는. 시장에서 팔아야지!” “내다 팔아서 뭐하게요?” 사장은 이 멍청한 어부가 하도 딱해서 덧붙였다. “이놈아 그래야 돈을 벌지.” 그러자 어부가 또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돈 벌어서 뭐하게요?” “돈을 벌면 더 큰 배를 가지고 더 많은 고기를 잡을 거 아냐!” “더 많은 고기를 잡아서 뭐하게요?” “더 많은 고기를 팔아서 더 많은 돈을 벌면 나 같은 사업가가 되어 인생말년을 행복하게 쉴 수 있지 않아!” 그러자 어부는 기가 막혀 말했다. “웃기네. 지금 난 나무 그늘에서 진짜 행복하게 잘 쉬고 있는데…?” 그 말에 사업가는 할 말을 잊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행복의 잣대는 어
사람은 태어날 때 어미의 자궁에서 머리와 손부터 나온다. 그렇게 태어난 인간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미의 젖무덤을 주무르다가 숟가락질을 익힌다. 말은 못 해도 싫으면 울음과 함께 손을 내젓는다. 적극적 의사 표현의 출발은 손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갓난아이는 손짓부터 한다. 무엇을 하든 손이 먼저다.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고, 손으로 균형을 잡아가며 걸음마를 배운다. 학교에 들어가면 손으로 글씨를 쓰고 손가락으로 셈을 배운다. 이때부터 인간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대체로 글씨쓰기를 즐겨 하는 어린이의 ‘부지런한 손’은 인생의 성공 길에 들어설 확률이 높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이때부터 ‘손의 역할’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손의 진가가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다. 높은 빌딩 안에서 펜대나 놀리는 사람은 ‘고운 손’으로 일생을 보내게 되지만, 힘겹게 막노동을 하면 ‘거친 손’을 면할 수 없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의 ‘더러운 손’은 죄악의 수갑을 차게 된다. 남의 물건을 훔쳐 자기 뱃속을 채우는 ‘검은 손’이 있는가 하면 혹은 폭력으로 사람을 쳐서 죽이는 ‘피 묻은 손’도 있다. 연일 뉴스에서 떠들썩한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