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은 거친 폭우와 함께 맞이하게 되었다. 가정의 달 5월을 절반 이상 보낸 지금, 역사가 남긴 상처로 아직 아파하는 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자 친척인 것이다. 김재홍의 2004년 작 <아버지: 장막 1>은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존재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이다. 앙상하게 마른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며 누워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계신지 갈비뼈는 한껏 하늘을 향해 있고 겨드랑이와 배는 쭈글쭈글하다. 아버지의 몸을 기다란 곡선으로 횡단하고 있는 상처가 안타깝다. 아직 아물지 않았는지 상처는 벌어져 있고 혈흔은 번져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단순히 상처가 아니다. 기다란 철조망 장벽인 것이다. 아버지의 몸은 바위산이고, 기다란 철조망은 바위산 위를 구불거리며 길게 드리어져 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서 2020년 기획 전시 <광장>을 통해 몇 년 만에 관객에게 선보였다. 아버지의 몸 위를 횡단하는 철조망은 단연 분단된 이 나라의 아픔을 뜻하는 바이겠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가장으로서 남모를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들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화가가 그들의 모습을 그리는 동안 꽤 묘한 기류가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식이 화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부모였지만 모델이 되어 달라는 자식의 요청에 응하며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폴 세잔이 <화가의 아버지, 루이-오퀴스트의 초상>을 그렸던 것은 1866년의 일이었고 그림에 입문한지 몇 년 뒤였다. 성공한 자산가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아들은 결국 화가가 되었다. 모델에게 미동도 하지 말고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주문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세잔이었으니, 나이 든 아버지로서는 그림이 완성되는 동안 포즈를 취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잦은 말싸움을 벌였을지도 모르겠다. 세잔이 겪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이 작품은 아버지를 향한 반항심을 드러낸 작품으로 해석되곤 한다. 특히 아버지가 들고 있는 신문의 이름이 자주 회자된다. 보수 성향이 강했던 세잔의 아버지가 즐겨 읽던 신문이 아닌 진보 성향의 신문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신문의 이름쯤이야 모델 없이도 화가 혼자서 얼마든지 그릴 수 있었을 테니, 세잔의 아버지는 출품이 될 때까지도 자신이 들고
여느 때보다 차분한 봄이다. 축제 때마다 거리를 가득 채우던 음악이 들리지 않으니, 이렇게 조용히 봄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세월호 6주기를 맞아 다시금 밀려오는 슬픔을 작가들과 공감하러 미술관으로 향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필자는 세월호 1주기와 2주기 즈음 합동분향소를 방문하고 추모 전시를 관람하러 안산을 찾아갔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곳을 갔던 것은 일종의 순례였다. 화랑유원지에 설치된 하얀 돔은 국화 송이를 손에 든 추모객들로 가득했고 분향소에 흐르던 음악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참 구슬펐다. 필자와 함께 분향소에 왔던 네 살 된 딸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분향소의 슬픈 분위기에 눌려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곳을 직접 찾아가 보지 않고 단지 뉴스로만 시청했다면 6주기를 맞이하는 지금 필자의 심정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순례를 떠날 장소가 필요하다. 안산에서 진행된 세월호 추모 전시에는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수백 명의 현대미술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전시에 참여했었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1주기 추모 전시 <망각에 저항하기>
n번 방에서 자행된 폭력이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려버린 요즘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익명이 보장된 공간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하게 돌변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러한 잔혹한 행위가 돈으로 거래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온라인상에서 자행되는 폭력은 우리 사회의 오랜 논란거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은 인간이 지닌 폭력성을 지속적으로 고발해 왔다. 클래스 올덴버그는 청계천에 설치된 높은 소라껍데기 형상의 조형물의 작가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작업 초기에는 평범한 일상에 만연한 폭력성을 고발하는 작업을 했었다. 스웨덴인이었던 그는 1960년에 미국의 그리니치 빌리지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건달들, 주정꾼들, 매춘부들, 권총 든 사람들이 넘쳐나는 거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극도로 자본화된 사회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이처럼 잔혹한 거리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리에 뒹굴고 있는 쓰레기들과 파편들을 주워왔고, 그것에 석고와 물감을 덧발라 권총 모양을 만들었다. <레이건 스펙스 Ray Gun Spex>(1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장기전이 되고 있는 와중에 봄은 찾아왔다. 마른 가지에 돋은 눈이 새삼 강인하다고 느껴진다. 땅을 비집고 나오는 옅은 초록처럼 희망도, 우리 안의 생명력도 언제나처럼 고개를 들 것이다. 성큼 다가온 봄이 반가우면서도 마냥 즐거워할 수 없는 봄의 입구에서 문득 천경자의 작품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1년 천경자는 <생태 生態>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화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수십 마리의 뱀들이 뒤엉켜 꿈틀거리는 형상은 매우 독특하면서 신선했다. 게다가 이처럼 파격적인 주제와 구도의 작품이 여성 화가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여성 화가들의 활동이 드물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화가는 뱀의 생생한 움직임을 그리기 위해 동네 시장의 뱀 장수를 매일 찾아가 한동안 뱀을 관찰했었다 한다. 각기 다른 색깔과 무늬를 지닌 뱀들이 구불거리며 뒤엉켜 있는 모습은 생명이 지닌 강인한 힘과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은 허구를 그린 것이 아니라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지만, 관객들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한다. <생태>를 그렸을 당시 천경자 화백은 어려움을 겪고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 기세가 꺾일 줄 모르며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요즘이다. 필자는 유치원을 갓 졸업한 아이를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숨죽여 뉴스를 보곤 한다. 연일 새로 발표된 확진자 수와 이동 경로를 발표하는 관계자들과 언론인들, 바이러스 검사와 확진자 치료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료진들을 바라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 와중에도 감동적인 소식을 접하였는데, 극심한 의료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대구로 많은 의료진들이 자원봉사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또한 대구의 한 게스트하우스 운영자는 이들 자원봉사 의료진들을 위해 숙박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급박하고 정신없는 소식들이 넘쳐나는 요즘 이들이 시민사회에 베풀어준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 되어 필자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문득 누군가에게 베푼 호의가 바이러스 못지않은 전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미술작가들 중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전파력을 가지고 관객들과 소통하는 이들이 있다. 쿠바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활동했던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라는 작가는 79.3㎏ 만큼의 사탕을 전시 공간에 쌓아놓고 관객들에게 사탕을 가져가도록 했다. 전시를 마치
금호미술관 <바우하우스와 현대 생활 Bauhaus and modern Life>전이 2월 2일 종료됐다. 전시 막바지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을 무릅쓰고 많은 관객들이 마스크를 끼고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와 빌헬름 바겐펠트 Wilhelm Wagenfeld가 디자인한 의자, 난나 딛젤 Nanna Ditzel, 알바 알토 Alvar Aalto가 디자인한 어린이용 의자, 마리안느 브란트 Marianne Brandt가 디자인한 각종 주방 소품들이 보인다. 조금 연식이 오래되었을 뿐 이미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기에 전시장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풍경이 생경스럽기도 했다. 물론 전시장에 놓인 소품들은 이 유명 디자이너들이 최초로 제작한 물건들이기에 그 값어치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의 디자인이 오늘날에는 대량생산되는 제품이 되어버렸기에 그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되어 버렸을 뿐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들의 디자인 작업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어린이 의자와 가구 전시 섹션이 흥미로웠다.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들이 만들었던 최초의 어린
요즘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갈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평소 너무나 좋아하는 제니 홀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 층을 가로지르는 로비의 높은 천장에는 LED 기둥이 매달려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현대 여성 문학가 한강, 김혜순, 에밀리 정민 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속 문구들이 실린 사인물이다. 문구들은 전파를 타고 하늘을 향해 빠르게 상승하고 있고 기둥은 느닷없이 움직이며 길어졌다 줄어들었다 한다. 과천관에는 호수 다리의 대리석 난간에 제니 홀저의 아름다운 문구들이 새겨놓았다 한다. 조만간 그곳에도 한번 가봐야겠다. 제니 홀저는 시각 예술가이지만 언어를 활용한다. 그는 도시의 풍경 속에, 일상의 소품 속에 자신이 직접 적은 경구들을 새겨놓는다. 그의 경구 속에는 잔잔한 감동과 예리한 찔림이 있다. 묘비에 새겨놓은 문구처럼 여러 번 곱씹게 되는 문구이며, 인생의 교훈을 주는 문구이다. (실제로 제니 홀저는 묘비 위에 글을 새기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평소 잔소리도 싫어하고 자기 계발서의 조언들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제니 홀저의 글은 참 좋았다. 그의 경구는 도시의 풍경을 배경으로 물처럼 공기처럼 잔잔히 흐르곤
최근 ‘놀면 뭐 하니’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 칼럼니스트는 이 프로그램의 성공 이유로 담당 PD의 유연성을 꼽았는데, ‘유산슬’이라는 캐릭터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이를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계획을 급하게 수정했다는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이나 미술 작업이나 계획대로 되기보다 우연한 계기로 급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가 보다. 사실 ‘놀면 뭐 하니’라는 질문은 예술가들에게는 뼈아픈 질문이다. 예술가를 둘러싼 사회와 제도는 예술가를 향하여 늘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놀면서 우연히 탄생한 뛰어난 창작물들이 역사에 그리 많았는데도 말이다. 에디슨의 그 유명한 명언,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실제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1%의 영감이 아니면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없었다’는 자기자랑이었음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겠지. 물론 ‘놀면 뭐 하니’ 제작팀이 예술가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프로그램의 제목을 그렇게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놀기 좋아하는 허다한 사람들을 몰아세우려는 의도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출연자들이 낄낄대며 정말 신나게 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정의 형식과 계
1923년 미국의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는 뒤샹이 작품 활동을 접고 체스 선수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소문이 날만도 했던 것이 당시 뒤샹은 일 년에 몇 차례나 국제 체스 경기에 출전했고 작품 활동을 매우 등한시했기 때문에다. 심지어 니스, 파리, LA 등에서 열린 체스 경기에서 그는 꽤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24년 오토 노르망디 체스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기사는 뒤샹이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인 체수 선수이며 매우 직설적인 전략을 쓰는 선수라고 평한다. 그러면서 다다이스트(Dadaist) 뒤샹이 체스 판 앞에서만큼은 다다이스트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뒤샹이 처음 체스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뉴욕에 정착하고 난 바로 다음부터였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인 1919년 미국에서는 금주법이 내려졌다. 뉴욕의 예술가들은 그 시절 뉴욕의 거리가 적막했었다고 술회한다. 금주법이 내려졌다고 사람들이 전혀 술은 마시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높은 값을 지불하면 밀거래되던 술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술값은 치솟았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공장과 가게가 뒤섞인 공동주택 내의 작업실은 안락한 구석이라곤 찾아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