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랫말을 들어보시길. 병영 앞 대문 앞에 가로등이 켜져 있네/ 여전히 그 앞에 서 있는 그녀/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려 하네/ 가로등 곁에 서 있고자 하네/ 예전에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예전에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후략… 단박에 사랑 노래라는 것, 릴리 마를렌이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기존 가요 가사와 별다른 것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야기 하나 들어보시길. 2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패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던 미군 병사가 독일군 저격병에게 잡힌다. 미군 병사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소원 하나만 들어달라고 청한다. 미군 병사는 지니고 있던 트럼펫을 꺼내 생애 마지막 연주를 한다. 독일군의 손에 쥐어진 총구가 흔들리고 그의 뺨에 눈물이 번진다. 연주가 끝나자 독일 병사는 총을 버리고 가버렸다는 이야기. 미군병사가 연주한, 죽음에서 그를 구한 곡은 앞서 소개된 '릴리 마를렌(Lili Marleen)'이었다. 독일의 사랑 노래 '릴리 마를렌'은 두 군인의 마음만 흔든 곡이 아니다. 2차 대전 중 수많은 군인들을 울렸다. 노래가 만들어진 것은 1915년.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독
국정 성공은 언론과의 관계에 달렸다. 언론과 적대적 관계를 맺어선 정부의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언론자유 보장은 민주주의 근간. 권력의 견제는 언론의 역할이다. 3권 분립 원리상, 입법부와 사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지만, 한계가 있다. ‘공직이라는 한 울타리’… 까닭에, 정부에 대한 진정한 견제는 언론자유에서 나온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지난 9일,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11일~16일)에 MBC 취재진을 전용기에 탑승시키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언론계 5단체(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영상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 전국언론노동조합)는 정부와 전면전을 불사키로 했다. 정부와 언론이 긴장 태세에 있다. 현 정부의 복합위기가 증폭되는 분위기다. 작년에, 국경 없는 기자회는 ‘2021년 언론자유지수’를 발표했다. 한국은 세계 42위. 아시아 1위를 마크했다. 언론자유 선진국인 영국은 33위, 미국은 44위였다. 되레 미국은 한국보다 낮은 순위였다. 아태지역 언론자유의 모델로 인정받은 한국 언론이 퇴보와 진보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관용성’과 ‘개방성’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특징이라면, 이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억압’과 ‘폐쇄’의 방향
리어카 한쪽 울긋불긋한 꽃 깃발처럼 꽂고 다니는 시든 사내 왜 조화(造花 )를 꽂고 다니냐 물으면 시들지 않아서라 한다 오늘 물어보았을 때 죽지 않아서라 했다 다음에는 버리기 아까워서라 하겠지 언제나 세 가지를 맴도는 대답의 시들기 싫은 사내는 버리지 않은 자신을 아까워 밀고 왔다 죽지 않는 그 사내 날마다 거리에 활짝 꽂혀 있다
진도 앞바다에서 좌초된 세월호에는 수학여행에 나선 어린 학생들 300여명과 일반인 승객, 승무원들이 타고 있었다. 누구 한사람 이 큰 배가 침몰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은 갖지 않았다. 배가 좌초돼 기울었을 때도 승객들은 곧 구출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해경 헬기도 뜨고 경비정도 사고 해역 주변으로 몰려오는 모습은 승객들에게 곧 자신들을 구해주리라는 마음을 갖게 했을 터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구조에 나서지 않았다. 학생들은 “움직이지 말라”는 선장의 명령에 따라 가라앉기 시작한 배 안에서조차 혹시 구조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당국에 상황을 전하였다. 그러나 구조대는 오지 않았고 살아야 했던 생때같은 목숨들은 배와 함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온 국민이 이 끔찍한 수장 장면을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생생히 목격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와 똑같은 죽음이 당국의 무대책과 무대응으로 이번에도 되풀이되었다. 단지 참사현장이 먼바다가 아니라 대통령실과 대통령 관저 사이의 중간쯤인 1.5km 지점, 우리나라에서 가장 치안이 철통같다는 곳이다. 대통령실과 관저 경비에 무려 1100명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어서 경찰 출동도 마음만 먹으면 신속히 이
최근 북한이 핵 무력의 사용을 법제화하고 무력시위의 수위를 높이자 그 대응책으로서 전술 핵무기의 재배치, 나토식 핵 공유, 핵 개발 등의 논의가 재점화하고 있다. 핵 개발 주장은 아직 소수 의견에 불과하나 전술 핵무기의 재배치 또는 나토식 핵 공유 주장은 이전보다 높은 강도로 제기되고 있다. 전술 핵무기의 재배치 또는 나토식 핵 공유는 실현 가능한가, 현재의 확장억제보다 더 큰 효과를 보장하는가, 대안은 없는가? 바이든 행정부는 집권 내내 ‘핵무기 없는 세상’의 비전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한 오바마 행정부의 핵비확산 정책을 계승하고 있기에 전술 핵무기의 재배치와 이를 전제로 하는 나토식 핵 공유에 부정적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정확도가 향상되었으므로 전술 핵무기의 재배치는 군사적 효용 가치가 거의 없고 현재의 확장억제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화된 북한의 핵 능력 앞에서 미국의 확장억제 약속에만 의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나토의 핵 공유가 군사적 효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 이유가 미국이 동맹국을 보호하려는 의지의 상징물로써 가치가 있기 때문임을 고려하면 우리도 대안을 마련하여 미
자기애(自己愛)는 오만의 시작이다. 오만은 방치된 자기애가 기승을 부리는 상태이다. 자기애, 즉 자신을 전 세계의 누구보다 위에 두고 싶어하는 마음에 혐오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눈이 먼 시각장애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의와 진리와도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의에 반하는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남들보다 높이 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진리에 반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높아지는 일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파스칼) 인간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올바른데도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죄가 많은 데도 자신을 올바르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파스칼) 인간은 분수(分數)이다. 분자(分子)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외면적이고 육체적이고 지적이고 소질이고, 분모(分母)는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는 정도이다. 즉 자신의 소질을 증대시키는 것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일이지만, 자신의 분모을 줄이는 것,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낮춤으로써 무한대에 가까워지는 것,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물질은 가볍고 밀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넓은 장소를 차지하는 법이다. 오만한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는 가치도 이와같이 가
직업병의 대물림이라는 비극적인 태아 산재 보상에 대한 시행령 개정안이 2022년 10월 17일 드디어 입법예고 되었다. 더불어 2017년 직업성 암의 추정의 원칙 도입 이슈 등과 같은 업무상 질병에 있어서 산업재해 적용의 확대를 위한 제도적 개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터의 위험으로부터 손상된 자녀의 건강도 산재보호 받는다 2023년 1월부터 뱃속의 태아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법')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임산부 근로자의 업무 환경 탓에 선천적으로 건강 손상을 입고 태어난 자녀도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동안에는 태아의 건강이 업무상 재해로 인해 손상받더라도 근로자 당사자가 아닌 태아는 청구권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산재법상 보험급여 청구자는 수급자와 동일해야 하는데, 근로자 뱃속의 태아는 근로자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계기는 2009년 제주의료원에서 시작되었다. 제주의료원 임부 간호사 15명 중 5명이 유산,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출산했다. 이후 서울대 산학협력단에서 역학조사를 실시하였고, 역학조사 결과 의약품 등 화학물질 노출, 환자 폭언·성희롱으로 인한 스트레스, 인력 부족·교대근무로 인한 육체적 부담 등이 임부 간호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일그러진 생각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정부와 지자체의 직무유기에 따른 인재인데도 젊은이들이 놀러가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가의 의무인 안전은 오간데 없다. 사회 일각에서 왜 이런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축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한 게 아닌가 한다. 이태원 핼로윈 축제를 의미 없는 유흥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포털 사이트 뉴스 댓글은 참가자들을 비난하는 글로 가득 차 있다. "축제라기보다 하나의 현상"이라고 말한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인식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에 대한 국가 지원을 반대하는 국회 국민청원이 일주일 만에 목표치인 5만 명을 달성한 것은 그 정점에 해당한다. 이런 인식은 한국에서 자발적 축제문화가 강릉 단오제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끊긴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조선총독부와 박정희 군사정권 등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축제를 미신으로 프레임 씌웠다. 90년 대 이후 축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나 지자체 주최의 지역 축제나 상업적 축제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20세기를 빛낸 찬란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울림이 있는 색상과 심플한 형태로 자기만의 화법을 개척했다. “예술가는 본능과 직감에 의해 이끌려야 한다”는 명제로 예술을 새롭게 창조한 마티스. 그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북부 카토 캄브레시스의 외할아버지 댁이었다. 하지만 유년기를 보낸 건 외가에서 15킬로 떨어진 보엥 앙 베르망드아의 부모님 집이었다. 부친은 곡물과 그림을 파는 가게를 했고 모친은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가 자란 곳은 베틀을 짜는 직물염색공업이 발달했다. 마티스의 색감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마티스는 청년기까지 전혀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법률보조인으로 일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일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급성맹장염 수술을 받고 한 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 때 어머니는 그에게 화구상자를 주었다. 이는 정녕 신의 한수였다.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마티스는 인생의 재미를 느꼈다. 결국 직장을 접고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학창시절 마티스는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낀 채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우리의 생명의식과 신의 관계는 우리의 감성과 세계 또는 사물과의 관계와 같다. 감성이 없으면 우리는 세계와 사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생명의 의식이 없으면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신을 섬기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고 이성이 주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자유의사를 가지면서도 역시 정의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신이다. 대체로 우리의 마음이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인식을 이성에 전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어려운 일이다. 또 과연 이성은 마음 없이 저 혼자 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신을 인식해야 이성이 그것을 탐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리히텐베르크) 신의 이념은 확실히 위대하지만, 그것은 결국 무한하게 정화되고 무한하게 높여진 우리의 정신적 자질의 이념이다. 신성 이념의 기초는 우리의 내부에 있다. (채닝) 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 좋은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엔젤리스 실리시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