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너의 노동은 0원. 너의 노동은 자원봉사. 너는 과로하는 백수” 나의 실상이다. 나는 ‘무급’ 마을활동가이다. 그 시작은 이랬다. ‘아이 셋을 데리고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없을까?’ 세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과 병행하면서 점차 도시재생, 사회적 경제, 마을공동체 영역으로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그러다보니 아이를 데리고서 하려던 일은 아이를 데리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돌봄교실에 알아봤더니 자녀를 맡기려면 ‘맞벌이 부부’라야 한단다. 일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재직 증명서’와 ‘의료보험 납부 확인서’를 제출하라는데. 그건 뼈 빠지게 일해도 내가 만들어낼 수 없는 문서였다. 그때 처음 무급으로 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돈으로 노동의 가치를 매기는 사회에서 돈을 받지 않는 노동에 ‘공권력’이 발부하는 성적표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에 대한 증명서와 확인서였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이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마을활동은 육아와 가사노동과 함께 대표적인 그림자 노동에 속하고 나는 주구장창 그림자 노동을 해왔다. 임금노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림
대장동 불길이 언론계로 번지고 있다. 언론인 출신의 김만배, 전직 언론인 남편 남욱 등 대장동 관련자들과 거액의 돈거래를 한 기자들이 속한 언론사가 공개됐다.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한국일보다. 관련 기자들의 이름은 이미 언론계에 비밀이 아닐 정도로 회자되고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손쉽게 기자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명품구두를 받았다는 채널A 기자도 마찬가지다. 시민들은 그들이 보도헀던 기사를 찾아내 교묘하게 편파보도 한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채널A 기자는 김만배와 머니투데이에서 같이 근무했던 2011년 5월 31일, 50억 클럽 멤버 곽상도 변호사를 공동 인터뷰 해 《저축은행 비리, 처벌 강화해야 발본색원》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곽상도는 완벽한 법조인으로 그려졌다. “검찰권은 국민을 대신해 수사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는 검찰이 돼야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검찰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과 함께 더 이상의 찬사가 없을 정도다. 한국일보 기자는 지난해 10월 《30%에 갇힌 민주당》이란 칼럼에서 “대장동 수사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 턱밑까지 파고들었다.”며 “민주당 내부에서 이재명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되고 있고, 민주당발 정계개
요즘 인기를 끄는 아파트는 공원이 있는 ‘공세권’, 숲이 있는 ‘숲세권’,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이나 내가 있는 ‘수세권’이라고 한다. 주거지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쾌적성 등 자연환경의 중요도가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길고 긴 코로나 팬더믹을 겪으면서 주거환경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아파트 주변의 공세권, 숲세권, 수세권을 갖춘 데 더해 단지 내 제대로 된 조경 공원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주택산업연구원은 ‘2025년 미래주택시장 트렌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자들의 35%는 주거지 선택 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연이 주는 쾌적성’을 꼽았다. 이 설문조사 결과는 2016년에 나온 것이니 이미 이전부터 교통(24%)이나 교육(11%)보다 쾌적한 주거환경을 더 선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동산 플랫폼 직방이 2021년 자사 어플리케이션 이용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이후 주거공간 선택 시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인은 ‘쾌적성(공원, 녹지 주변)’이 31.6%로 가장 많았다. 분양시장에서는 공세권 숲세권 아파트가 우수한 분양성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연구원이 아파트 녹지를 녹색기반(그린인프라
기업 실적발표 시즌을 맞아 삼성전자를 필두로 국가산업의 대표주자급 기업들의 잇따른 ‘어닝쇼크(예상보다 저조한 실적발표)’가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전 산업계의 실적 부진 결과가 수치로 증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현실 앞에서도 권력다툼에만 혈안이 돼 도무지 범국가적 경제위기 탈출구를 모색하지 않는 정치권은 큰 문제다. 기업과 정치권이 가용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해법을 찾아야 할 때다. 시즌 첫 주자였던 삼성전자의 실적은 놀라움 그 자체다. 삼성전자의 작년 4분기 영업이익은 연간 매출 300조 원 돌파라는 신기록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동기 대비 69%나 감소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LG전자의 영업이익은 무려 91.2%나 줄어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최악의 반도체 업황에 SK하이닉스는 흑자는커녕 적자 전환 전망이 유력하다. 다른 기업들의 실적 예측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석유화학·철강·디스플레이 업계 역시 시황 악화로 실적 추락 폭이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전방위적 실적 부진이 현실로 나타나 전 산업 분야에서 빨간불이 차례로 켜지는 형국이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사 178곳의 작년 연간 영업이익은 전년 대
가장 멀리 간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데 있다, 가슴 속에
넷플릭스의 오스트리아 6부작 드라마 ‘우먼 오브 더 데드’의 주인공 블룸(안나 마리아 뮈에)은 직업이 장의사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하도 시체를 많이 봐서인지 살면서 그리 무서운 것이 없다. 성격도 냉랭한 편이다. 말하는 것도 남을 배려하거나 하지 않는다. 도무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지만 오직 한 사람, 곧 남편 마르크(막시밀리안크라수스)에게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마르크는 아침 출근길에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그 광경을 블룸은 두 눈 뜨고 지켜보게 된다. 블룸은 차차 남편의 사고가 의도적이었으며 누군가, 어떤 집단이 남편을 살해했음을 알게 된다. 블룸의 가혹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원래 이런 류의 자경단(自警團) 영화는 (그 이름도 추억에 젖게 만드는) 찰스 브론슨의‘데스 위시’ 시리즈가 원조였다. 아내를 살해하고 딸을 강간해 죽인 범인들을 찾아 일일이 응징하고 죽이는 중년 남자 폴 커시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형편없었으며 찰스 브론슨의 대표작 ‘빗속의 방문객’, ‘원쓰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황야의 7인’ 등에 비해 그의 명성을 몇 단계 떨어뜨리는 작품이었지만 오히려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찰스 브론슨은 이
작년 말부터 2023년 벽두까지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들은 올 한 해에 대한 여러 예측을 쏟아내고 있다. 대체로 낙관적인 예측보다 비관적인 예측이 더 우세하다. ‘위기’ 또한 가장 인기 있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위기’는 옮음과 그름, 삶 혹은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 등을 의미했지만, 근대에서 위기는 선택조차 쉽지 않은 위기의 일상화 시대로 변모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도와 타이완의 위기, 식량 불안 위기, 경기침체 위기,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부채 위기, 이란 핵문제, 기후변화 악화 등은 단골이거나 중첩되는 위기 속 예측 소재들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은 거의 상수로 자리 잡아 국제정세 예측의 기본 축이 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예측에 한반도가 빠질 수 없다. 북한의 무인기 기습과 군의 허술한 대응 모습은 계축년의 한반도가 더 격랑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임을 시사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본 적이 없는 지각변동’이 한반도에도 밀어닥치고 있음을 예고한다. 김정은 정권은 그간의 북한이 구사해온 對남한 전략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핵무기와 미사일의 고도화가 거의 달성되었다는 나름의 자신감
새해 첫날 들었던 생각이다.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굳이 안다면, 그 어떤 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나는’과 ‘모른다’ 사이의 괄호에 어떤 단어를 적어 넣어도 무방하다. 나는 (구름을) 모른다. 나는 (바람을) 모른다. 나는 (햇살을) 모른다. 구름도 바람도 햇살도 모르는 내가 사람과 도시와 세상을 알 턱이 없다. 사람은 고사하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를테면 미움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바름이라든지 그름 같은 것을 모른다.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안다고 끄덕였던 적도 있었는데 부끄러운 고갯짓이었다. 교과서 몇 권 읽었다고 안다고 믿는 건 착각이다. 앎이란, 그렇게 하자는 인간의 약속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니까.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하물며 새가 왜 우는지조차 나는 모른다. 우는지, 웃는지, 부르는지, 화내는지, 노래하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지 알지 못한다. 내게는 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눈이 없어서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다. 없으니 모를 수밖에. 새해 첫날부터 모르는 것투성이다. 모른다는 고백을 인간이 정한 약속으로, 그러니까 말 혹은 언어라는 기호로 나열하고 있는 나는 얼마나 궁색한가. 궁색을 넘어 무용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