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언명하였다. 그저 시간이 흘러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나 인물이 현재와 미래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최근 독도 인근에서 일본과의 해상 훈련이 여론의 관심되면서 이 훈련이 ‘한반도에 욱일기 휘날릴 우려’라는 행태로 비판을 받자 한 정치인이 일본은 조선과 전쟁을 한 적이 없고 조선은 내부에서 썩어서 무너졌다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식민사관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조선이 무능하고 부패하여 내부적으로 붕괴된 것이며,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패망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조선이 내부적으로 무너지는 상황이라면 힘에 의한 일본의 한반도 침탈은 정당화되는 것인가. 이 같은 식민사관적 발언에서 역사의식의 부재(不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잃은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핍박받고 피눈물을 흘렸는가. 상해로 하얼빈으로 또 만주벌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유랑 가요의 고전은 태평레코드사에서 1940년 10월 발매한 음반으로서 ‘산 팔자 물 팔자’와 뒤를 이은 ‘번지 없는 주막’이란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40년의 대표곡이요 히트곡으로써 백년설이 불렀다. 이 가요는 해방이 되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까지 불러졌다. 내 기억의 저장고에 기록된 내용의 가사를 보자면, ‘산이라면 넘어주마 물이라면 건너 주마 / 인생의 가는 길이 산길이냐 물길이냐 / 그님도 짝사랑도 풀지 못할 내 운명 / 인심이나 쓰다가자 사는 대로 살아보자’ 이다. 나는 인천에 사는 매형의 회갑 때 이 노래를 불렀다. 많은 사람이 산길인가 물길인가 하면서 지치고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도 그랬다. 산길인지 물길인지, 번지 없는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다시 걸어야 했다. 그때 장만(張晩)의 시조를 만났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워라 /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갈이만 하리라.’ 바다의 풍랑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험한 산길에서 다시 고생을 한 어느 한국인의 한숨 소리를 듣는 듯했다. 이어서 배·말 다 집어치우고 흙 속에서 호미로
자본주의 상징인 미국 뉴욕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OWS)’는 시민 시위가 있은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2011년 9월 ‘고학력 저임금’ 세대가 시작한 일종의 계층 투쟁이었던 OWS는 그 후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6년 10월 시작된 광화문 촛불 집회는 누적 참여 인원 1600만을 넘어서면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내었다. 세계 최초로 평화 시위에 의한 정권 ㅛ체의 무혈혁명이다. 군사정권의 맥을 이어온 새누리당은 적폐 정당으로서 와해 되었고, 19대 대선 패배를 통해 민주당 정권이 등장했다. 이런 흐름은 21대 총선까지 이어져 민주당의 역대급 국회 의석 확보로 나타나, 사회개혁을 위한 행정부 및 의회 권력을 확보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1%는 기득권을 이용해 배를 불리고, 코로나19는 양극화를 더욱 심화되었다. 심지어 촛불 시민은 지난 대선에서 쫓아냈던 적폐정당의 재집권마저 목격하게 된다. 적폐 정당에 기반한 검찰 독재정권의 출범이었다. 그동안 힘들게 전국에서 서울로 집결했던 촛불시민들의 열망과…
김정은 정권이 하루가 멀다하고 미친 X 널뛰듯 핵무력을 과시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맞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공포의 균형’으로 일컬어지는 핵무장론이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타부로 여겨져 온 ‘핵사용 전략’을 구체화하고, 선제핵사용 독트린마저 폐기한 북한을 상대로 우리가 취할 궁극의 수단이기도 하다. 더욱이 국제적 핵질서의 조정자역할을 해왔던 NPT(핵확산금지조약) 거버넌스는 핵보유국, 특히 러시아가 비핵국을 상대로 핵위협을 노골화함으로써 균열조짐도 보이고 있다. 그간 우리는 NPT 체제를 최대한 존중하고 핵무기 개발보다 IAEA의 사찰 등을 적극 수용하면서 평화로운 핵이용에 앞장서왔다. 그러나 지난 8월 뉴욕에서 4주간의 토론에도 불구, 최종문서도 도출하지 못하고 끝난 NPT 10차 평가회의는 NPT 존속의 당위성에 의문을 더한다. 여기에다 1995년 25년간 한시적 존재키로 했던 NPT를 영구연장키로 한 ‘NPT 영구연장’은 비핵국과 핵보유국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영구연장 이전에는 핵보유국의 핵비확산 요구와 비핵국의 핵군축 요구가 대체로 균형을 이루었지만, 이후에는 핵비확산 의무가 더욱 강조되었다. 핵보유국은 더 이상 비핵국의 눈치를 보지 않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속삭이듯 들려오는 한 줄 글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얻고 잃음의 반복이지만, 가을에 부디 아프지 말라고 시가 위로를 건넨다. 점점이 붉어지는 단풍을 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웃고 있을 사람을 생각한다. 수고로이 얻은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가을은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다. 10월의 단풍을 아니 보고도 가을을 보냈다 할 수 없다. 쫓기는 원고에 매달려 풍경을 잃어버릴 즘 오랜만에 생각나는 지인에게 살뜰한 전화를 건네면 이미 좋은 곳을 찾아 휴일을 즐기고 있다. 아직 번듯한 명함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말이라도 공손할 일이다. 감질 거리는 생각한 줄 쓰려고 무수한 날이 필요하겠지만 잊는 것도 순간이다. 떠나려고 단풍은 저리도 몸서리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여기까지 올 수 있다. 부디 아프지 마라. 아무도 모르게 떠나면 쉽게 잊힌다. 먹고살기 힘들어 고향을 떠난 때가 어제 같은데, 건강식만 골라먹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잘 살아야지. 주위를 둘러보면 아픈 사람이 꽤 많다. 쌀이 없어서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 오니 고질적인 위병이 사라졌다고 좋아하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병으로…
세상 사람들이 수많은 진리의 높은 계시 중에서 지금은 이미 시대에 뒤처져버린 가장 낡은 것만 받아들여, 간명하고 솔직하고 자주적인 모든 사상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 대부분을 기를 쓰며 반대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소로) 인류의 종교적 의식은 결코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더욱 순수해져 간다. 만약 누군가가 고정된 관념을 고집하면, 설사 그것이 옳은 관념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미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기둥에 비끄러매는 사람과 같다. 지금에 있어 진리라 하더라도, 더 높은 단계의 발전을 저해한다면 미망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유해한 미신의 하나는 세계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창조주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창조주의 신을 생각해야 할 아무런 근거도 필요도 없으며(중국인과 인도인들에게는 그런 관념이 없다), 또 창조주 또는 주재자로서의 신의 관념은 그리스도교의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신, 영혼으로서의 신, 사랑으로서의 신의 관념과는 양립할 수 없다. 창조주로서의 신은 냉혹하며 고뇌와 악을 허용함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영혼으로서의 신은 고뇌
1.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어린 나이라도 자잘한 추억들이 남아 있을 법하다. 그런데도 몇 가지 파편 외에는 이상할 정도로 머리속에 남아있는 게 없다. 그중 하나. D시 달성동 329번지, 한옥 집 대청마루. 어느 봄날의 오전이었을 게다. 동쪽으로 네모난 창에서 비쳐든 햇살이 마루 저쪽까지 길쭉하니 하얀색 꼬리를 빼물고 있었으니. 양철 바케스 안에서 자라 서너 마리가 숨을 들이마시느라 뻐끔대며 물 위로 코를 내밀던 장면이 떠오른다. 한참동안 아팠다가 회복된 나를 위해 자라를 잡았던 모양이다. 어여 마셔라, 크고 하얀 사기 대접에 넘치는 생피의 비릿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그걸 다 마셨다. 그렇게 해야 어머니가 좋아할 것을 아니까. 가톨릭계 사립인 H초등학교 입학 추첨에서 떨어진 날도 기억이 난다. 바람이 무척 매서운 날이었다. 추위를 피해 성당 건물 한 켠 양지바른 곳에서 손을 잡고 기다리다가 잘못된 ‘은행알’ 골랐다는 최종 발표에 그만 울어버렸다. 그리고 입학한 동네 근처 S초등학교 입학식 날. 왼쪽 가슴에 핀을 꽃아 늘어 맨 손수건이 조금 비뚤어졌던가 보다. 어머니는 군청색 한복 두루마기 자락을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기 속에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의식의 눈뜸이야말로 복음서가 부활이라고 부르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열매가 익으면 꽃잎은 진다. 네 속에 신의 의식이 자라기 시작하면 너의 약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비록 천년에 걸쳐 어둠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해도 빛이 그것을 뚫으면 이내 환해진다. 네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아무리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해도 신이 그 속에서 눈을 뜨면 당장 환하게 밝아진다. (바라문의 잠언) 자존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신을 보는 데서 생긴다. 그러므로 자존심의 근원은 종교 안에 있다. 그 가장 좋은 예는 겸허함 속의 위대함이다. 어떠한 귀족도 황후도 자존심이란 의미에서는 성자와 비교될 수 없다. 성자가 겸허한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그가 느끼는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머슨) 사람을 아는 지자(知者)이지만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진정한 현자(賢者)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신도 알게 된다. (동양의 지혜) 신은 네 가까이 있다. 하느님은 너와 함께, 그리고 네 속에 있다. 신의 영혼은 우리 속에 있고, 언제나 우리의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너의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장범준이 부른 “멜로가 체질”의 OST 다. 나영석 PD가 “신서유기” 후속으로 새로 기획한 ”뿅뿅 지구 오락실” 이 방송되자마자 화제다. “신서유기”도 튀었지만 이번 출연자는 래퍼 이영지가 2002년생, 아이돌 그룹 바이브의 안유진이 2003년생 등 M세대의 막내 1명과 Z세대의 3명으로 구성되었다. 영지와 나PD 간에 벌어지는 티티카카는 X세대와(나영석) Z세대의 차이를 절로 느끼게 한다. 영지에게 놀림받느라 영석이 형 매우 고달프다. “지금 몇 년 차인데 그래… 옛날 사람이구나” 독일 사회학자 만하임이 말한 존재의 사유 구속성이란 개념이 있다. 인간의 사유방식은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시공간적 구조, 경제구조 등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말이다. 세대가 다르면 각 세대별 존재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유도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샴푸는 럭키화학이 1976년 발매한 “유니나”다. 그 이후 나온 허벌 샴푸, 창포 샴푸, 홍삼 리앤 샴푸 등 모두 자연의 향을 담기 바빴다. 그런데 웬걸? 꽃들 속에 너의 샴푸 향이 느껴진대. 베이비부머 세대와 X세대는 자연의 향을 제품에 옮겨오는데 열중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
‘심심한 사과’라는 말이 한글날 즈음에 논란이 됐다. 사과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심심하면, 당연히 아니 된다. 마음 전해지도록 진해야 하고, 간간해야 한다. 따분하고 맛없으면 되겠는가. (언어) 전문가들도 걱정한다. ‘심심한 사과’는 문해력 결핍의 상징과도 같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슬그머니) 내미는 계기로 삼지 말라는 ‘경고성’ 칼럼도 눈에 띄었다. 그 칼럼의 한 대목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사회 일각에서는) 딴 생각 말라.’는 취지의 주장이 쟁쟁하다. 이런 논의는 이집트상형문자나 갑골문 같은 어원 공부에 관심이 있는 필자에게 좀 불편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한국어의 어휘와 시민의 어휘(능)력을 망가뜨리지 말자는 것이다. 한자교육은 그 다음의 주제다. 그 논설의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라는 대목을 거푸 읽는다. 이런 생각에 부응하는 연구와 성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된다. 이번 경우, ‘심심하다’에 ‘맥없고 맛없다.’는 뜻 말고도, ‘마음의 드러냄(표현)이 깊고 간절하다.’는 뜻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