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월요일 늦게 헤이그로부터 미샤 힐레슘과 가족들을 이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에티에게는 그것이 끔찍하고 갑작스레 일어나 깜짝 놀랐다. 에티는 언제가 가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부모와 함께 가지 않고 혼자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조피는 에티가 떠나는 날 열차로 걸어가는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기차로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명랑하게 웃으면서 친절한 말을 했고, 활기찬 쾌활함이 충만했고, 아마도 슬픈 기미가 있었지만, 우리가 아는 에티는 어느 모로 보나 괜찮았다. ...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1번 화물차에 타는 것이 보였다. 결국 에티는 12번 화물칸에 타게 되었다. ... 그 후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리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1,000명의 ‘이송 대상자들’이 떠났다. 1번 화물칸의 틈새로 언뜻 미사가 힘껏 손을 흔드는 모습이 휙 지나갔고, 12번 화물칸에서 에티가 쾌활하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 그들은 가 버렸다. (열차가 네델란드를 떠나기 전에 에티는 크리스틴 반 누텐에게 보내는 엽서를 써서 열차의 판자벽 틈새를 통해 밖으로 던졌다. 부근의 농부들이 그것을 주워서 주소지로 보냈다. 엽서에는
최근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도발행위에 대한 추가 대북제재 결의안이 유엔 안보리 이사국의 압도적 찬성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유엔 안보리는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에 이어 이번 북한의 유엔 결의 위반행위에 대해서도 효과적인 제재를 하지 못함에 따라 ‘무용론’과 함께 상임이사국 비토권 거부 등 안보리 의사결정 변화 요구가 강하게 제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문제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가 보여준 입장은 북한의 안전 우려에 미국 등 상대국가가 적절한 고려와 상응 조치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북한 도발에 따른 동북아 지역과 세계인들의 불안은 등한시한 체 같은 진영의 북한만 감싸고 도는 ‘편파적 입장’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갈등과 대결에서 평화와 협력, 번영으로 가기위해서 일부에서는 남북한과 미국이 2018년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하지만 2018년과 2022년은 상황이 다르다. 코로나 19라는 팬데믹이 있고 2018년의 탐색적 대화가 북한 핵문제 해결과 적대관계라는 근본문제 진전이 없이는 의미있는 성과를 낼 수 없고 그 여파로
선(線)은 점(點)이 모여 흘러가는 강이다. 점과 점을 딛고 걸어가는 길이다. 앞선 점의 어깨와 다음 점의 이마를 밟을 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다. 그런 이유로, 흘러가는 것들은 죄다 서럽다. 끌려가는 것들은 고달프고 밀려나는 것들은 안쓰럽다. 도시의 뒷골목은 둥둥 떠내려가는 것들의 비명으로 한낮에도 먹먹하다. 먹먹하든 막막하든 도시는 멈춤을 허락하지 않는다. 신호등에 있는 빨간불이 세상살이에는 없다. 멈추면 죽고 흘러야 산다. 깨지든 말든 멈추지 마라. 침 발라가며 돈을 세는 손가락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전염병이 별을 삼켰다. 입과 코에서 뱉은 작은 점들이 집과 마을과 도시로 흘러들었다. 강처럼 바람처럼 흘러드는 바이러스의 점들 앞에 사람이 쳐놓은 방어선은 속수무책이었다. 점이 서고 선이 자빠졌다. 총구를 겨누는 군대도 힘으로 무장한 권력도 무너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봉쇄와 추적과 격리의 선을 전염병은 놀리듯 넘나들었다. 전염병 앞에서 만물의 영장은 한없이 무력했다. 급히 만들어진 백신과 치료제는 흥정할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돈 많은 나라 국민은 천천히 죽었고 가난한 나라 백성은 빨리 죽었다. 집에서 죽고 길에서 죽고 병원에서 죽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는…
지루하고 답답했던 선거도 끝났다. 현수막 피로감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여름이 오고 가면 가을이다. 모두가 역사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이제 맨 정신으로 스스로를 찾아 나서 자신을 위한 진정한 행복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다. 내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힘으로 학교를 다니기 위하여 집집마다 신문 배달하는 것을 지금의 아르바이트하듯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문 밖에서 던지는 신문이 집 안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싫지 않다. 이어서 일찍 배달된 신문에서 풍기는 활자의 잉크 냄새가 아침 공기와 함께 신선하게 느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문과 인연이 깊다. 아니 문학을 하나의 업으로 생각하며 노력하는 길에서 신문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신선한 영양소를 제공했다. 사회적 정보와 함께 어떻게 살며 세상을 읽어나가야 할 것인가를 깨우쳐주는 산사의 풍경과도 같았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는 다 읽은 신문의 필요한 부분을 오려 ‘스크랩 북’을 만들었다. 문화면과 오피니언에 실린 철학적인 내용들을 잘 오려서 스크랩에 풀로 붙여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글 짓고 강의할 때는 물론 축사나 조사를 할 때도 스크랩북에서 그 분위기에 맞는 단어와 문장을 참고하면서 나의 정서에
(에티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피신을 하거나 숨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에 앉아서 쓴다. 숨었던 2만,000여명 중 1만8000여명은 살아남았다.) 당면한 문제는 우리의 파멸과 멸절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환상에 빠져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키려고 나섰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나아가야 한다. 최근 며칠 새 나의 내면에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어떤 것은 구체화되었다. ...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았고, 그것을 삶에 받아들였다. 그래도 삶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의 삶은 죽음 덕분에 확장되었다. 죽음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파멸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삶이 확장되었다. 만일 소환장이 내일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내 속으로 물러나, 몸과 영혼의 구석구석에 있는 기력을 모두 모을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스틱은 던져버릴 것이다. 그 주가 끝나기 전에 릴케의 편지를 마저 읽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남겨두었던 두꺼운 겨울 외투 옷감으로…
매클루언은 또한 ‘미디어는 마사지다’라고 했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말의 연장이다.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되는 미디어의 특성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미디어 연구자들은 미련하게도 미디어의 ‘본질’보다는 미디어 수단이나 과정에만 관심을 둔다.” 다음으로는 정보의 비판적 수용과 주체적 수용이다. 미디어를 통해 무수히 쏟아지는 허위조작정보를 어떻게 가려내 유용한 지식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다. 『청소년과 미디어』 교재에서는 다양한 사례 분석을 해놓았다. 이런 식이면 누군가가 일일이 추적해서 가짜뉴스에 대한 팩트체크를 해주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교재에서 ‘허위조작정보와 팩트체크’ 단원을 보면,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야 한다면서 “사실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것이고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해놓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용자 스스로 허위 정보에 대한 감식안(鑑識眼)과 분별력을 갖출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높이려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그런 감식안과 분별력을 갖출 수 있을까? 근원적으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바로…
지난 뉴스의 몇 대목이다. - 정호영 장관 후보자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40년 지기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며, “(윤 당선인이) 대구로 발령을 받고 1년에 두어 번씩 만났다.”고 밝혔다. -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은 ... ‘40년 지기란 표현은 잘못 알려진, 잘못된 사실’이라며 선을 그었다. - ... “정 후보자도 ‘지기’라는 표현이 민망하다고 언론에 말한 걸로 안다.” 지기(知己)냐, 아니냐의 거북한 논란인가. ‘그다지 가까운 사이의 친구는 아니다.’라는 얘기를 저런 식으로 표현하게 된 상황이 이채롭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내내 ‘나는 당당하다.’고 강변했던 정호영 장관 후보자는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자기를 아는 친구’ 지기지우(知己之友)의 준말 知己. 사전에는 친우(親友), 벗과 함께 지음, 심우(心友) 등이 ‘비슷한 말’로 열거돼 있다. 어떤 친구가 ‘지기’인가? 안다는 뜻 知 글자가 붙은 지음(知音)의 뜻을 새기면 ‘보통 친구’와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을까? 知音은 대개 知己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중국 춘추시대의 백아절현(伯牙絶絃) 고사다. 거문고 명인인 백아가 친구 종자기(鍾子期)를 병으로 잃고 슬픈 나머지 거문고 줄(絃)을 끊고(
장미가 아름다운 유월이다.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가열차게 달아올랐던 지방선거도 끝났다. 심판할 국민이 있고 공정한 규칙이 있다면 전쟁같은 선거라도 지면 어떻고 이기면 어떠하리. 경험을 얻고 다시 도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력을 사용해 동족끼리 죽고 죽이면서 파괴한 전쟁에 비기겠는가. 유월은 한갓 풀대의 생리보다도 못한 인간의 무모한 장난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고통을 가져온 달이다. 어떠한 규칙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의 기억은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힌다.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해야할 까. 뇌는 모든 기억을 담도록 하지 않는다. 적당히 망각하고 적당히 기억하면 될 텐데 잊지도 않고 찾아오는 유월이 있어 아름다운 장미조차 핏빛으로 보일 때가 있다. 유해를 발굴하여 산화된 뼛조각을 찾아 그날의 고통을 돌아보고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묻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이 시간은 평행이동을 한다. 가해자가 있어 피해자가 있고, 그래서 용서받고 싶은 사람과 용서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남북은 오랜 세월지난 지금도 동족이 피투성이 되도록 싸웠던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와 조국의 이름으로 ‘한국전쟁’, ‘조국해방전쟁’은 다른 기억
정권이 바뀌면 새 정부는 ‘규제 철폐’, ‘공기업 민영화’를 구호처럼 외친다. ‘맛깔 나는’ 메시지다. 국민의 지지 획득에 ‘규제 철폐’만큼 좋은 것은 없다. 반면에 규제 철폐와 결은 다르나, 비슷한 맥락의 ‘민영화’에 대해 국민은 ‘호의적’이지 않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민영화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지만, 국민은 공공재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재화임을 잘 알고 있다. 지난 5월 17일, 국회 운영위에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의 질의와 응답이 논란이 됐다. 김 실장은 민영화와 관련해 “경영은 정부가 하되 30~40%의 지분을 민간에 팔자는 것”이라고 했다. 민감한 이슈다 보니 대통령실은 ‘개인 의견’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민영화는 종국적으로 ‘요금 인상’의 결과를 낳는다. 때론 국민의 생명을 위협한다. 선진국에선 이미 홍역을 치렀다. 40년 전 일이다. 재정적자를 이유로 시작된 1980년대 영국의 철도, 프랑스의 수돗물, 미국과 독일의 전력 민영화가 그 예다. 국민들의 값진 희생 후에 다시 국유화, 공영화가 됐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때부터 줄곧 ‘계획경제체제’와 ‘큰 정부 이념’을
선거가 끝나면 어김없이 이어지는 통과의례가 있다. ‘수사’다. 전국에서 수많은 고소·고발이 이뤄지고 이에 따라 수사기관의 수사가 이어진다. 낙선자에게는 선거에 떨어진 마당에 수사까지 받아야 하니 설상가상일 것이다. 하지만 수사는 낙선자보다는 당선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치열한 선거의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수사의 결과에 따라 정확히는 재판의 결과에 따라 그 승리는 자칫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선거사범에 대한 수사는 당선자를 한순간에 낙선자, 아니 낙선한 전과자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수사의 영향력이 크다 보니 많은 후보는 자신의 선거운동 못지않게 상대 후보의 위법사항을 수집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는 한다. 상대가 지켜보고 있으니 후보들은 더더욱 위축되고는 한다. 감시와 위축 그리고 위험은 선거를 극도로 예민한 일련의 과정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한다. 그 결과 후보들은 모든 행위를 일일이 선관위에 물어보고 나서야 실행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한다. 사사건건 고소·고발이 이뤄지고 사사건건 선관위에 질의하다 보니 선관위 역시 사사건건 규칙과 규율을 만들게 되고 만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선거규율은 세계에서 가장 특이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