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신록의 달이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꽃들이 일시에 피어 무작위로 향기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오월이요. 하얀 밥을 머리에 이고서 하늘을 우러르는 나무의 경건함을 볼 수 있는 것도 오월이다. 꽃비를 맞으며 걸을 수 있는 것도, 꽃이 떨어진 자리에 작은 열매가 도톰히 자리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오월이다. 오월을 금방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 하는 것은 여름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고, 울바자 사이로 삐어져 나온 꽃이 더욱 붉고 아름다운 것은 경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동네에는 아카시아 꽃 향기가 그득하다. 바람이 불어오면 양태머리를 땋아올린 꽃송이가 꿈결같이 밀려온다. 콧구멍으로 후~ 들어오고 후~ 나가고 잡힐 듯 말 듯, 그리고 수수꽃다리 향기는 얼마나 진했던가. 한 송이라도 가져오면 집안이 향기로 가득하다. 향기라도 마음껏 취할 수 있었으니 스물한 살 청춘은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맨발의 청춘이라 하지 않는가.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해서 추억조차 힘겹지만 그래도 20대만큼은 빛나게 반짝인 때이다. 아무도 아니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는 알고 있으니 그것은 후각 이 지각을 깨운 덕분이다. 아카시아 꽃, 수수꽃다리 향기너머…
3-3-4. 이는 축구 포메이션 중 하나지만 선거 공학 기본 틀이기도 하다. 3은 여와 야를 각각 지지하는 이른바 진보와 보수 세력이고 나머지 4는 무당파 세력이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집토끼 격인 자신의 지지 세력을 우선 묶어둬야 한다. 그런 다음 자기정체성이 불명확한 무당파층을 끌어들여야 승리할 수 있다. 무당파층의 다른 이름은 중도층이다. 진보와 보수의 중간에 끼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중도는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실제 중도는 많은 의심을 샀고 푸대접을 받아왔다. 격랑의 현대사에서 기회주의적 정치 세력으로 치부된 것이다. 진보 쪽에서 보면 서슬 퍼런 시대에 중도는 보수보다 더 위험한 세력이었다. 정체가 불분명한 것은 섬뜩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보수 쪽에서도 중도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진보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중도층에게 봄날이 찾아왔다. 진보와 보수 세력 모두에게 피아 구별이 어려웠던 지난 대선에서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대선주자들은 앞다투어 중도층 구미에 맞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말끝마다 중도를 외쳤다. 민주당 후보는 진보적 어젠다를 외치지 않았고, 국힘당 후보는 보수적 어젠다를 외치지 않았다.…
1. 한의원 옆 호실은 이태쯤 전에 산부인과로 바뀌었다. 가끔 직원들이 침을 맞으러 왔다. 지난 월요일, 아침 8시쯤 출근하는데 불이 환하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라 무슨 일이지? 싶었다. 한의원 청소 중에 환자분이 산부인과 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환자는 십여 분 넘게 문을 두드렸다.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바라만 보는데, 괜히 마음이 무거웠다. 이른 시간에 병원을 찾은 건 간밤에 몹시 아팠거나, 사정이 급해서일 터다.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한데, 왜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걸까. 원장님 안 계셔도 어지간하면 좀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하지. 반갑게 인사하던 직원이 얄밉게 느껴졌다. 수요일, 오늘. 출근해서 청소하는 중, 월요일에 왜 그랬는지 알게 됐다. 의료기 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 남자 둘이 비싼 진단장비를 무겁게 밀고 오는 것. 그러니까 월요일에 불이 켜져 있던 이유는, 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사전 준비 중이었던 모양이다. 의료기 회사 직원들로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고 직원도 없는데 함부로 문을 열어줄 수 없었으리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으로 직원을 나무란 내 성급함이 부끄러웠다. 2. 공자가 채나라로 가던 도중 쌀이…
태초의 근원적인 힘이 우주를 탄생시켰다. 모든 에너지가 단 한 번의 폭발로 분출되어 단 하나의 선물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존재였다. 긴 시간이 흐른 다음 별들이 생겨나 반짝거리고 그 별빛 아래 도마뱀이 눈을 깜빡거리게 된다면, 그 또한 시간이 시작되었던 태초, 바로 그 순간 불타올랐던 그 신비한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태초의 우주는 스스로 섬세하게 자기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일 공간의 생성 속도나 중력이 어느 한쪽으로 쏠렸다면 우주의 모험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 아래 돌고래가 파도처럼 높이 굽이치면서 헤엄쳐 나아가는 것과 같은 바로 그 생명력은 우주 태초의 절묘한 역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우리는 돌고래와 태초의 찬란한 불꽃을 완전히 분리된 사건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죽음과 파괴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우주를 지배하겠다는 인간 종(種)의 결정은 결국 인종주의, 군국주의, 성차별주의, 인간중심주의를 생기게 했고, 이것은 인류가 수용하기 벅찬 우주의 차원을 관리하려는 노력에서 생긴 잘못된 책략이었다. 각각의 시공간이 가진 창조성은 다른 모든 시공간의 창조성과 다르다. 우주는 모든 존재로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와 다음과…
수원서 인천공항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3시간 남짓 걸린다. 화성이나 용인서 출발하면 시간은 더 소요된다. 이천이나 평택, 안성은 말할 것도 없다. 간혹 버스나 지하철을 놓치게 되면 이동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수도권에 ‘제3의 공항’이 필요한 이유다. 경기남부지역에 국제공항이 들어설 때가 됐다. 환경은 무르익었다. 환경부, 국방부, LH 등의 전향적 움직임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도 당선인 때부터 “중앙정부 대폭 지원”을 약속했다. 게다가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김동연, 국민의힘 김은혜 경기도지사 후보도 ‘수원군공항 이전 및 경기국제공항 건설’에 뜻을 같이 하고 있다. 공항 유치는 부산과 대구에서도 큰 이슈였다. 해당 지역사회와 정치권이 시끄러웠었다. 이렇듯 웬만한 지역에선 “신공항 OK!”를 외치며 목청을 돋우는 것이 통례다. 그런데 희한하다. 경기지역에선 “신공항 ‘NO!’” 목소리로 인해 사업이 몇 년째 표류 중이다. 가히 이상하다. ‘님비’(Not In My Backyard ; 내 뒷마당엔 안 돼) 현상과 ‘핌피’(Please In My Front Yard ; 내 앞마당으로) 현상이 뒤바뀌었다. 비근한 예로 인천국제공항 건설 때
조선시대 실용주의 사상인 ‘실학(實學)’을 논하자면 그 중심에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지은 다산 정약용 선생을 먼저 세울 수밖에 없지요. 과연 “민생의 의사가 국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정치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한 그의 주장은 절대왕정 국가에서 대단한 용기로 평가받을 만해요. 그런데 다산 선생의 국가 개혁 욕망을 자극했다는 반계(磻溪) 유형원 선생의 책을 읽다가 가슴이 뛴 적이 있답니다. 다산보다 무려 140년을 앞서 태어난 반계가 남긴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놀랍게도 ‘노비제도의 폐지’ 주장을 보았던 거예요. 조선 망국의 원흉이 국가 생존력을 떨어뜨린 신분제도라는 사실을 깨달을 즈음이었지요. 물론 오늘날처럼 ‘만민 평등’을 주창한 건 아니에요. 반계 선생은 중국의 예를 따라 ‘한 집에 기거하면서 노동을 제공하여 그 대가로 의식과 품삯을 받도록 하는’ 고공제도(雇工制度), 그러니까 일종의 ‘고용노동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했더군요. 반계를 읽자니 일찍이 조선 왕들이 유형원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용주의(Pragmatism)를 진화시켰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더라고요. 새 정부가 출현할 적마다 한번은 등장하곤 하는 ‘실용주의’라는 용어가 윤석
하늘과 산과 호수에 담긴 구름이 조화를 이루는 아침 시간이 있습니다. 호수 수면 위 연잎은 표면적 무늬가 됩니다. 그것은 호수 내면에 감춰진 흙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갈대는 지난 해 그 모습보다 낮아지고 빛바랜 그대로 서 있는데 그 자리에 푸른 빛 여린 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세대교체보다 생명교체가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호수 중심 낮은 말뚝에는 해오라기 한 마리가 제 쉴 곳 일번지나 되는 듯, 위에서 내리긋는 획 같은 형상으로 졸고 있습니다. 그 모양이 물속으로 스미어 물 위아래 풍경이 하나가 됩니다. 호수의 풍경이 정지된 영상처럼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 순간 쇠물닭 한 마리가 수면 위로 반원을 그리며 지나갑니다. 바람에 밀리는 물결은 솟아오른 아침 빛 머금어 남에서 북쪽으로 물무늬 지으며 번져갑니다. 꽃 진 자리/ 잎 솟고/ 아기 녹색(幼錄)/ 꽃보다 고운데// 비에 씻긴 철쭉/ 맑음이어라/ 하늘 길 찾아가는/ 선한 눈망울 어느 해 봄에 써 둔 시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창을 넘어온 햇살이 내 책상에 와 머물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었습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이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삶과 죽음의 의의에 관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영혼은 배우지 않는다. 다만 원래 알고 있던 것을 떠올림 따름이다. (다우드 엘) 현자는 언제나 만물 가운데서 도움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어진 재능의 본질은 모든 사물 가운데서 선을 이끌어 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존 러스킨) 정치적 승리, 수입의 증가, 너희 가운데의 병자의 회복, 멀리 갔던 벗의 귀가 같은 행운은 너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너희에게 드디어 좋은 날이 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너희 자신 외에 너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머슨) 인생의 사명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바깥 세계에서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너희 자신의 마음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싹의 상태로 있으니, 너희는 선한 생활로 그 해답의 싹을 틔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예지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류시 말로리) 벗을 찾아 헤매는 자는 가련하다. 왜냐하면 참으로 충실한 벗은 자신뿐이며, 밖에서 벗을 찾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참으로 충실한 벗일 수 없기 때문이다. (소로) 누가 가르쳐준
17개시도 교육감선거가 이번에도 깜깜이 선거로 치러질 전망이다. 교육감선거는 시도지사선거와 똑같은 광역선거인데도 대중적 인지도가 없는 교육계인사들이 소속정당도 없이 나오는지라 일반유권자 입장에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깜깜이 선거가 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매우 높다. 중앙선관위와 지역선관위가 특별한 책임감으로 달려들어서 교육감선거가 깜깜이 선거가 안 되도록 적극행정을 펼쳐야만 하는 이유다. 중앙선관위의 지침에 따라 지역선관위와 지역 언론이 합심해서 교육감후보들의 언론노출기회와 정책토론기회를 최대치로 올려놓는다면 교육감선거가 깜깜이 선거가 될 수 없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강원, 경기, 전북, 광주의 현역교육감은 3선을 채웠거나 고령을 이유로 출마하지 않는다. 이런 ‘무주공산’ 지역에선 후보들 간에는 몹시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게 마련이지만 지역 언론, 특히 지역TV가 돕지 않는 이상 일반유권자들은 무지의 장막 안에 갇히지 않을 수 없다. 현직교육감이 출마하는 나머지 13개 시도지역의 경우에는 현직프리미엄 문제가 과도하게 발생한다. 현직교육감과 달리 도전후보들은 인지도 차이 때문에 고전을 면할 수 없다. 도전후보에게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며 유권자의 선택을 돕기…
칼럼 ‘심우도’를 시작할 때 쓴 글 한 대목이다. ‘... 손 모양 계(彐) 아래 만들 공(工)과 입 구(口)다. 다시 쓰면 左(좌)와 右(우)다. 아래는 손목에 점찍은 마디 촌(寸)이다. 어둠 속 안개바다를 좌우로 손 내밀어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심우도’는 만해(卍海) 한용운 선생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이다. 연애편지 같은 시(詩)도 남겨 청춘남녀에게도 인기 높은 스님 만해, 뜻은 깊되 말은 쉽다. 큰 스승이다. 왜놈들 제국주의 아래서 치욕의 삶을 살았던 그의 집 이름이 심우장(尋牛莊)이다. 남향(南向) 피해 총독부와 등을 졌다. 절집 빙 둘러 바람벽에 그려진 심우도(尋牛圖) 그림과 뜻 같으리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에서 비롯해 끝내 아지랑이로 스러지는 모든 사물(一切 일체)을 담은 집이면 그건 우주다. 비유의 세계다. 아지랑이 같은 이 비유는 그 바탕이 그림이다. ‘안개바다를 좌우로 손 내밀어 한걸음씩 나아가는 발걸음’ 묘사는 찾을 심(尋)의 뜻을 추상화한 그림이다. 당신은 ‘찾는다’는 뜻을 어떻게 그릴까? 안개 속 헤매봤다면, 저 표현력을 실감할 수 있을 터. 글(文 문)을 깨친다는 것은 (文 속의) 그림을 본다는 뜻이라네. 뜻글자인 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