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B가 교실에서 무언가 훔친다고 했다. 특수학급 보조교사는 문구용품과 간식이 사라진다며 ‘범인’으로 아이들을 지목했다. 장난과 호기심에 한두 번 그러다 말겠지 했지만 세 번째 도적질이 보고되자 두 녀석을 불렀다. “너희들이 한 짓을 이미 알고 있다. 이실직고하면 부모님께는 말씀 드리지 않겠다. 대신 교실에서 가져간 것을 낱낱이 써내라” 녀석들을 협박했다. 가정에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약속 때문인지 열심히 훔친 내역들을 써내려갔다. 자백을 받아내는데 나름 효과가 있구나 하고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발달장애 아이들이라 정직하고 순수했다. “아닌데. 더 있는데. 선생님은 너희들이 뭘 가져가는지 몰래 지켜봤다. 아직도 빠진 게 있으니 빠짐없이 써내라” 했다. 당황한 녀석들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적고 또 적었다. 열심히 작성한 도난품 목록에 순진하게도 ‘정수기 물’까지 등장하자 비로소 취조를 멈췄다. 아이들이 돌아간 후 도난품 목록을 읽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A는 책, 교구, 문구류, 간식 등 가져간 물품이 다양했다. 단지 재미로 훔친 것 같았다. 가정형편이 넉넉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가져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B가 적어낸 건 거의 ‘먹을 것’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문자점(問字占)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왕이 되기 한참 전에 함경도 안변(오늘의 강원도 안변군) 지역에서 앞에 놓인 많은 글자 중 ‘물을 문(問)’ 자를 짚고 점괘를 물으니 점쟁이가 “큰 대문 안에서 커다란 밥상을 받을 것이므로 왕이 될 팔자”라고 말하며 큰절을 올렸대요.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거지가 같은 글자를 짚자 “문(門) 앞에서 입(口)을 딱 벌리고 있으니 천생 거지 팔자”라고 핀잔하더래요. 비슷한 에피소드로 복자점(卜字占) 이야기도 있어요. 암행어사가 ‘점 복(卜)’ 자를 짚으니 “마패를 차고 암행어사가 될 팔자”라고 하던 점쟁이가, 지나가던 거지가 옷까지 바꿔 입고 같은 글자를 짚자 대뜸 “쪽박을 찬 거지 팔자”라고 멸시했다죠. 우리 정치인 중에 점을 치기 위해 철학관이나 무당을 찾는 이들이 유독 많다는 사실은 다 알려진 불편한 진실이에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명리학(역리학)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상당한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있어요. 불가측(不可測)한 요소들이 특히나 많은 선거를 앞두고 그들이 운세 풀이를 탐닉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죠. 손바닥 왕(王)자 논란으로 곤욕을 치른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석열 후보가…
1. 겨울밤, 인터넷 다운로드로 오래된 영화를 봤다. 《패왕별희(覇王別姬)》. 1993년 첫 상영 당시 잘라낸 15분을 추가한 완전판, 이른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유명한 경극(京劇) 제목을 영화 이름으로 빌려왔다.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과 천하쟁패를 겨룬 초패왕(楚覇王) 항우. 그와 일생의 연인 우희(虞姬) 사이의 비극적 사랑과 죽음을 다룬 공연극이다. 이 경극의 정점은 사면초가에 빠진 항우의 탈출을 위해 우희가 칼로 자기 목을 찌르는 장면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항우본기(卷七. 項羽本紀)'에서 쓰러진 우희를 안고 패왕이 부른 애절한 노래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름하여 해하가(垓下歌)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지만 때는 불리하고 추(오추마, 烏騅馬)는 가지 않는구나.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을고 우희야 우희야 어찌하면 좋을고“ 영화 패왕별희는 어떠한가. 경극 연습장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의형(義兄)을 사랑하게 된 데이(蝶衣, 장국영 분). 경극에서 주인공 우희를 연기하는 이 남자 또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다. 패왕과 우희의 고사를 이중적 메타포(metaphor)로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커튼
지혜로운 사람이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학자란 책을 읽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교양인이란 그 시대에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지식과 풍속, 관습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을 말한다. 현자란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오늘날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필요 없는 지식을 산처럼 가득 채워 넣고 자신을 학자나 교양인, 현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의의도 모르면서 오히려 그 모르는 것을 자랑하는, 깊은 미망의 구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학 분자식도 모르고 라듐의 시차와 그 성질도 모르는 무지한 문맹자 가운데, 인생의 의의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지혜로운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으며, 다만 끝없는 자만에 의해 더욱 미망의 구렁에 빠져드는 사이비 지성인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유일한 학문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학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의 손에 닿는 학문이다. 생명의 원리는 스스로 함이므로 이론으로 하면 진리는 곧 나 자신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생각만 하면 스스로 깨달
단순히 도덕적인 생활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도덕을 초월하는 것을 추구하라. (소로) 그리스도에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가 인간 영혼의 위대함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는 인간 속에서 신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어떠한 성격의 인간이든 그들 모두를 사랑했다. 예수는 인간의 겉모습을 꿰뚫어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육체는 그의 앞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부자의 아름다운 옷과 가난한 자의 누더기를 뚫고 그 안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는 무지의 어둠과 죄의 얼룩 한가운데서 무한하게 발달할 수 있는 힘과 완성의 싹을, 불멸의 영적 본성을 보았다. 그는 타락의 극에 달한 인간의 내부에도 빛의 천사로 바뀔 수 있는 본질을 보았다. (채닝) 신의 의식에는 지적인 것과 신앙에 바탕을 둔 도덕적인 면이 있다. 지적 인식은 허약하여 위험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한편 도덕적 인식은 도덕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자질만큼 신에게 돌리려 한다. 그와 같은 신앙이야말로 자연인 동시에 자연을 뛰어넘는 것이다. (칸트) 사랑이 우리 생활의 본원은 아니다. 사랑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닌 것이다. 사랑의
북한은 지난 연말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 농촌건설을 금년도 역점 추진사업으로 제시하고 지역별 기관별 궐기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북한 농촌 전지역을 북한이 자랑하는 백두산 삼지연지역 수준으로 현대화하고 농촌근로자들의 혁명역량을 강화해서 농업 생산량의 획기적인 증대를 도모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과학 영농과 쌀과 밀 생산 증대로 식문화를 바꾸며 유능한 젊은 인재들을 농촌지역으로 배치하고 협동농장의 부채도 탕감해 주는 특혜조치도 실시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식량 부족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김일성 시대부터 식의주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최소 1일 1만 톤이 필요하며 ‘인민의 소망이 이밥(흰쌀밥)에 고깃국’이라고 하였다. 김정은 위원장도 인민들이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 고 하면서 농업을 북한경제의 ‘주공전선’으로 설정하고 국가적 자원을 집중하여 왔다. 북한은 90년대 중반 극심한 식량난 이후 우리 및 국제사회 지원과 자구 노력, 그리고 외부 식량 유입 등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유지해 왔다. 하지만 지난해 김정은 위원장이 ‘고난의 행군 결심을 하였다, 전쟁상황 못지않은 시련의 고비’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특별명령
새해를 축하합니다! 만나면 서로가 주고받는 인사이다. 이날에는 궁색한 살림일지라도 새 옷을 사 입고 낡은 옷이라도 아주 깨끗하게 손질해서 입는다. 마지막 밤인 31일에는 눈썹이 희어진다고 자정이 되기까지 잠들지 않는다. 그렇게 맞이한 새해 첫날에는 정갈하게 만든 음식으로 조상들에게 먼저 제사를 지낸다. 추석처럼 요란하지 않고 간단하게 한다. 가장 좋은 것을 나름의 규정에 맞게 상위에 올려놓고 술잔을 돌리고 다음에 가족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한다. 남쪽에서처럼 해돋이를 보면서 소원을 말하는 풍경은 없다. 그러나 설날 아침은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 색다른 음식을 만드는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고 절구에 떡 찧는 소리도 들린다. 떡이 만들어지면 아이들에게 들려서 이웃에 보낸다. 그러면 이웃은 그릇에 떡을 담아 보낸다. 이렇게 오고 간 떡 그릇이 보낸 만큼 다시 돌아온다. 식사가 끝나고 햇살이 퍼지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러 다닌다. 아주 작은 세뱃돈을 주는데도 신나서 다닌다. 여자들은 설날에는 이웃집 출입을 삼간다. 남자들은 흥취가 돋아 스승의 집을 찾거나 친한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신다. 또 다른 풍경으로는 설날 아침에 누가 먼저 수
잠룡(潛龍)들 세상을 노리다. 선거 얘기다. 개천에서 용 났다. 이재명 대통령후보 얘기다. ‘개천용’은 우리와 친근한 이미지다. 중국 황제의 상징 용, 우리나라에선 그 그림 흉내도 못 냈다. 대신 봉황이 임금의 상징이었다. 청와대 문장(紋章)의 봉황은 이 굴레 벗지 못한 결과다. 20세 조지훈의 시 ‘봉황수’(鳳凰愁)는 뒤틀린 역사의 한(恨)을 품었다. 이제 그 한의 대상은 미국과 일본인가. 정신력 허전한 저 나라들의 짜증스런 사슬, 풀어버리자. 저 시의 해석과 해설들, 상당수가 헷갈렸더라. 입시용 상투적 문안의 몰(沒)지성에 섬뜩했다. 용을 서양신화의 드래곤과 혼동한 경우도 잦았다. 어찌 탓하랴, 구미(유럽과 미국)의 지식의 틀로만 가르쳐 왔으니. 요즘 뜬금없이 문해력(文解力)이 유행이다. 이는 여태 한글 못 배운 세대에게 가나다 깨쳐주는 ‘특수교육’이었다. 연예인과 교수 내세운 교육방송의 프로그램에 엄마들이 놀란 것이다. 초중고교생 상당수가 말귀 못 알아듣고 글눈 어두워 (책을) 읽고도 뜻을 짐작도 못 한단다. 그런데 그 원인과 해결책은 구미의 리터러시(literacy)에서 찾고 있다. 시청률도, 책 판매도 좋고, ‘문해력유치원’도 방송 중이란다. 문제가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메두사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난파선 생존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데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의 1819년 작품이다. 이 그림이 바다 위에 버려진 열 다섯명의 참혹한 생존 실화(實話)를 담았다는 걸 알면 더욱 충격적으로 작품이 그려낸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1816년 7월, 400여명이 승선한 ‘메두사’ 호는 아프리카 북서쪽 세네갈 해안을 돌다가 암초에 부딪혀 파선(破船)한다. 구명정이 부족한 상태에서 승선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버려지고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뗏목에는 그렇게 유기된 이들 147명이 타고 2주일을 정처없이 떠돌게 된다. 그러다 근방을 지나던 선박 ‘아거스(Argus)’에 마침내 구조된 인원이 단 15명이었다. 프랑스 혁명(1789년) 이후 루이 18세의 왕정복고로 반동의 시기를 거치고 있던 당시,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 전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먼저 빠져나온 자들은 대부분 귀족과 부자들이었고 버려지고 죽어간 이들은 하급 선원,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변화되었다고 여긴
정말로 음악 한 곡이 인생을 바꾼다. 열아홉 살까지 음악과 무관하게 살았다는 연주자 K. 대입이 코앞이던 어느 날, 방과 후 버스 정류장의 음반가게에서 들린 악기 소리에 ‘온몸이 빨려 드는 듯한’ 경험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기도 배우기도 힘든 악기라는 것을 안 K는 대입 준비를 던지고 독일 유학을 떠난다. 단지 그 악기를 배우기 위해. K의 무모함과 용기에 공감됐던 것은 나 역시 그 악기와의 만남이 전율이고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악기,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 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30년 전, 프랑스 영화 ‘ 세상의 모든 아침’을 통해서다. 영화에는 17세기 중반, 프랑스를 배경으로 비올라 다 감바와 운명의 늪에 빠진 세 사람이 나온다. 아내가 죽자 오두막을 지어 비올라 다 감바와 함께 죽는 날까지 칩거한 천재 연주자 쌩뜨 꼴롱브, 꼴롱브의 제자로 궁중음악가가 되었으나 평생 스승의 음악혼을 탐하고 질시하며 고통받는 마랭 마레, 아버지처럼 연주자가 됐으나 아버지보다, 비올라 다 감바보다 더 사랑했던 마레에게 배신 당해 죽음을 선택한 딸 마들린. 영화는 이 세 사람, 운명의 불협화음을 비올라 다 감바에 실어 예술의 비밀을 일러준다.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