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와 한적이 발표한 이산가족 실태조사 결과와 관련해서 이산가족 1세대분들이 고령화되어 물리적으로 상봉이 가능한 시기도 우리 국민의 기대수명 감안시 수년에 불과할 것이라는 안타까운 보도가 있었다. 이산가족 문제는 역대정부 최우선 해결과제였지만 그 성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는 북한이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 이념적 차원에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산가족을 북한 정권이 싫어서 떠난 사람 즉, 정치적 반대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리처럼 최우선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북한의 부정적 태도만을 탓한 체 고령의 이산가족분들이 이산의 아픔을 안고 세상을 떠나시는 상황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정부는 그 해법을 서독정부가 활용했던 ‘프라이카우프(돈을 주고 자유를 산다) 방식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이산가족 상봉 경비 지원은 물론 이산가족 상봉 성사 조건으로 식량 지원 등의 시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답례 차원에서 응해주는 형식으로 소수 인원의 2박 3일간 상봉행사 만을 허용했을 뿐이다.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2018년에도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단 한차례만 이루어졌다. 서구 문물을
사람들 사이에 사랑을 전파하는 것만이 현재의 사회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위험한 말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사악한 행위가 저질러지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사악한 행위가 자행되며,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큰 사악한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사랑이 인간 생활에 의의를 주고 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지만,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동서고금의 현자들에 의해 해답이 제시되어 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답이었다. 즉, 흔히 사랑이라 불리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마치 서로 이방인이나 원수처럼 살고 있는 이 피폐하고 낡은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준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여, 그들은 당장 정치가들의 외교활동과 거대한 군대, 수많은 요새가 아주 쉽게 사라지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은 어떻게 저런 불필요하고 사악한 것을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을까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에머슨) 중국의 현자 가운데 맹자와 비교되는 묵자(墨子)가 있다. 그는 권력자들에게 힘
코로나19에 대한 인류의 대응 양상은 오미크론 변이주 등장에 의해 다시 한번 흔들리고 있다. 지난 11월 24일 세계보건기구(WHO)에 처음 보고된 이후 각국의 치열한 방역 조치에도 불구하고 오미크론 변이주는 벌써 전 세계에 퍼진 것으로 본다는 테워드로스 WHO 사무총장의 발언도 있다. 국내에서도 코로나19 확산세의 급증이 보고됨에 따라 사적모임 허용 인원을 줄이고 다중이용시설 영업시간을 제한할 것으로 보인다. 병상 부족에 대한 대비책 마련을 포함해 지난달부터 시행돼 온 위드코로나 조치는 한 달 반 만에 멈추는 셈이다. 비대면 강화 조치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고통의 연장이기도 하다. 조만간 코로나가 감기처럼 인류 일상의 전염병으로 자리 잡음으로서 안정될 것으로 예상되고, 인류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 이후 변화될 새로운 일상의 생활양식이나 기준을 의미하는 뉴노멀의 포스트코로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과거와 달리 비대면 만남과 소통 방식이 강조되고, 재택근무가 보다 확대되고 이를 위한 맞춤형 사물인터넷 등의 확산 역시 필요하다. 코로나 사태로 잠시 잊혀진 듯한 4차 산업 혁명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면 코로나19는 비대면과 맞춤형 등의 여러 생활 변화를 촉발할
1.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할까. 논리적 호감만으로는 부족하다. 영혼의 말굽쇠를 떨리게 하는 무엇, 그렇게 함께 울고 웃게 만드는 공감의 파토스가 더 중요하다. 냉정하다, 과하게 성과 지향적이다. 이재명 후보에 대한 그런 평가가 많다. 맞는 면이 있다고 본다.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유권자가 국가 최고 지도자에게 위임한 권한을 속 시원하게 행사하는 모습. 그렇게 쾌도난마 막힌 속 뚫어주는 정치를 본 기억이 얼마나 까마득한가. 그러니 오히려 국민들이 바라는 측면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진짜로 이재명은 차가운 사람인가. 나도 그런 인상이 있었다. 하지만 올봄 유세 때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그가 저잣거리에서 유권자들 만나는 모습을 유심히 봤다. 무작위로 나누는 즉석 대화를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연습을 해도 솔직한 평소 태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금 놀랐다. 청문회장이나 기자회견장과는 달랐다. 마음과 눈이 서로 마주치는 현장에서 그의 대화는 논리적 접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스로를 활짝 여는 정서적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사람이었다. 평소의 이미지 너머에 다른
진실은 그 자체가 선은 아니지만 모든 선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다. 거짓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처음부터 거짓임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하는 의식적인 거짓말과, 도저히 진실을 말할 수 없을 때 본의 아니게 하게 되는 거짓말이다. 오직 미망만이 인위적인 지지를 필요로 한다. 진리는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다. 진리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고, 진리의 감미로움보다 더 감미로운 것은 없다. 진리의 기쁨은 그 어떤 기쁨보다 크다. (부처) 완전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언제나 온갖 종류의 모순 대립하는 욕구가 있으며, 그것이 서로 싸우면서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므로, 그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진실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자만이, 우리가 얼마나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거짓말은 모든 실생활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헌것을 새것이라 하고 팔거나, 흠이 있는 물건을 그렇지 않은 양 속여 팔고, 갚지 않을 거면서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는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주 흔한, 그리고 아주 큰 불행으로 이끄는 유혹의 하나는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유혹이다.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기어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쳐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예수) 우리에게 특별한 존경을 요구하는 사물을 만나면, 옷을 벗기듯 그것을 추앙하는 말들은 모두 벗겨내는 것이 좋다. 외면적인 치장은 자주 이성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때가 가장 속고 있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잘못된 수치심은 악마가 즐겨 쓰는 무기이다. 악마는 그 수치심을 이용해 잘못된 교만 이상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는 잘못된 교만만으로는 그저 악을 부추길 뿐이지만, 잘못된 수치심으로는 선을 저지할 수 있다. (존 러스킨) 이 세상에 악은 없다. 악은 모두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며, 이것을 물리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민중의 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민중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모른다. 나이 많은 사
1. 축구는 전쟁이다 한의사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위험한 운동은 축구다. 운동 중에 발목을 삐거나, 무릎을 다치거나,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환자 대부분이 축구광이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충분한 치료나 재활 없이 축구하다 다시 다쳐서, 아주 운동을 접는 경우도 여럿 보았다. 이건 내 개인적인 경험담일 뿐만 아니라 통계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인데, 학원 스포츠가 활성화된 영국에서 40대 이후 부상자가 가장 많은 운동은 축구 클럽 출신이 압도적 1등이었다. 축구하다 전쟁을 하기도 한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월드컵 예선전을 하다 전쟁을 일으켰다. 대략 5000명가량이 죽었다고 하는데, 물론 그 이전에 영토 문제와 이민자 문제 등으로 사이가 매우 나쁘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축구하다 졌다고 엘살바도르 여고생이 권총 자살을 하고, 대통령과 축구선수단 전원이 장례식에 참석해서 복수를 다짐하다니,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축구라면 가능하다. 위의 두 나라가 중남미 후진국이라 그런 게 아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난동을 부리던 영국 훌리건들이 프랑스 경찰 머리를 벽돌로 내리쳐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일도 있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마치 꽃들이 동 트는 새벽의 입맞춤에 피어나듯! 하지만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여, 더 잘 내 눈물을 말리기 위해, 그대 음성을 더 들려주세요! 영원히 데릴라의 곁으로 돌아온다고 말해 주세요! 너무도 애절한 아리아다. 용맹한 이스라엘 장군 삼손. 그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필리시테인 여인 델릴라. 백성을 배반하고 한 여인을 택하는 나약한 남자의 비극.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는 이 이야기를 '삼손과 델릴라(Samson et Dalila)'에 담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오페라곡은 탄생 당시 공연 금지명령을 받았다. 성경과 달리 묘사된 삼손이 프랑스 교회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결국 국경을 건너 독일로 갔다. 리스트는 생상스를 도와 바이마르 대공 오페라하우스에서 삼손과 델릴라를 연주하게 해 줬다. 고진감래라던가.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관객들의 찬란한 박수가 쏟아졌다. '동물의 사육제'로 더 유명한 생상스. 그는 파리 자르디네(Jardinet) 3번지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작곡을 시작했고, 열 살 때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가 됐다. 천재란 말을 다시 한번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상스의 음악
가난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죽 이야기, 부족함이 없을 때 먹으면 건강식이지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는다면 슬픈 이야기가 된다. 뜨거우면 불어서 먹고 식으면 그냥 음료 마시듯 ‘쉬운 죽 먹기’다. 남쪽에서 죽은 아주 고급지게 만든다. 배부른 곳에 와서 다시는 죽을 먹지 않으리라 했으나 별식으로 자꾸 권하기에 먹는데 그때마다 죽의 맛에 감탄한다. 죽에 대한 몇 가지가 기억을 떠올려 보면 가난한 때에 싫도록 먹었던 것이 먼저 떠오른다. 그 시기 먹었던 죽은 식욕에 대한 원초적 해결을 위한 것이기에 처절하다. 아주 작은 양으로도 살릴 수 있었는데, 영양실조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어미의 곡성, 떠도는 아이와 노인들, 죽느냐, 사느냐가 생사를 가르니 부족한 식욕이 식탐을 만들어 먹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죽 한 그릇이 소원일 때가 있었다. 곡기 없는 죽을 먹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면 생명이 경이롭기도 하다. 이 시기 먹었던 죽은 ‘맛’보다는 ‘생존’이었다. 죽을 ‘맛’으로 먹었던 때도 있다. 항상 가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넉넉할 때는 낭만도 있어 솥을 둘러메고 냇가로 나가 고기를 잡아 즉석에서 어죽을 끓여먹고 한바탕 놀 때도 있었다. 청진이나 해변가 사람들
첫아이 소풍 도시락을 호들갑 떨며 싸던 때가 있었다. 새 모이 마냥 밥 몇 숟갈 먹는 아이인데 잔칫상 차리듯 준비했다. 쪽잠을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재료를 손질했다. 오색 꼬마 김밥, 별 모양 소고기 주먹밥, 메추리알로 만든 병아리, 햄과 채소를 꽃잎처럼 오려낸 샐러드를 담았다. 내 아이만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도시락이었다. 엄마가 처음이라 그게 최선의 모성애인 줄 알았다. 그 아이가 다섯 살 무렵 나는 병설유치원 특수학급에서 일했다. 공교롭게도 첫애와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을 맡았다. 그래서인지 내 눈에는 덩치만 컸지 아직 아기들로 보였다. 엄마 품을 떠나 규범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게 짠하고 뭉클하고 안타깝고 대견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교사라기보다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해 봄날 아이들과 소풍을 갔다. 점심이 되어 각자 집에서 보내온 도시락을 가지고 모둠으로 둘러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한 녀석이 뭉그적대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조막만한 손을 만지작거릴 뿐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지 않았다. 교사의 재촉에 내놓은 건 검정 비닐봉지에 든 떡 한 팩, 소풍 도시락이었다. 뭔지 모를 부끄러움이 그 순간 나를 멈춰 세웠다. 뭐든 나눠 먹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