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됃이 피는 마을 까지 백 년이 걸린다 -- 서정춘 시집 「죽편」, 동학사 2002 아주 오랜만에 무궁화 열차를 탔다. 남쪽나라 풀섬으로 떠나는 밤차, 어딘가로 떠나는 밤은 아무리 여행이 목적이라 해도 마음을 긴장하게 하는 것이 있다. 불빛 환한 역사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밤차에 몸을 실었다. 짐들이 올려진 선반도 기차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 깊어가는 어둠속을 달리는 기차, 사람들은 속도에 맞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든다. 풀섬으로 가는 길은 백 년이 걸렸을까. 고속열차가 생긴 후 우리는 고즈넉한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싣는 일이 드물어졌다. 어디든 빠르게 바로 도착해서 바쁘게 움직여야 살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매사 서두르다보니 우리가 살던 세상은 저만치 뒤로 멀어져버렸다. 아득해졌다. 자꾸만 지워지는 기억을 간신히 움켜쥔다.…
얼마 전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집안에 있던 일가족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망한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끌어안은 채 발견돼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이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소방관으로서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컸다. 왜냐하면 1992년 7월 이후 지어진 아파트 발코니에는 유사 시 피난할 수 있도록 경량칸막이가 설치돼 있다. 경량칸막이란 발코니의 한쪽 벽면을 석고보드 등 쉽게 부술 수 있는 재질로 만들어진 피난구다. 이들 가족이 경량칸막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참사는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좀 더 안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소방안전상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중요한 3가지를 꼽자면 바로 ‘소소심’이다. 소소심이란 소방방재청에서 정한 반드시 국민들이 알았으면 하는 소방안전상식으로 첫째 소화기 사용법, 둘째는 소화전 사용법, 마지막으로 심폐소생술이다. 수많은 소방안전교육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한 상식 중의 상식이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이 긴박한 재난상황에서 능숙히 행동에 옮길 수 있을까란 물음에 ‘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긴 힘들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물결이 전 세계로 이어졌다. 만델라는 세계 정상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한 사람이다. 생애의 3분의 1인 27년 동안 옥중에서 보낸 뒤 70세가 돼서야 출소했다. 그가 출소할 때 사람들은 매우 허약해진 만델라의 모습을 상상했으나 만델라는 누구보다 건강하고 밝고 씩씩한 모습이었다. 기자가 만델라에게 “다른 사람들은 5년만 감옥살이를 해도 건강을 잃는데, 어떻게 27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서도 이렇게 건강할 수 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만델라의 대답은 감동적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물을 마시며 감사하고, 음식을 먹으며 감사하고, 강제 노동을 할 때도 감사했습니다. 늘 감사했기 때문에 이렇게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감사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됐는지 인정하고 말과 행동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감사의 성품으로 2014년을 시작하면 어떨까? 감사의 성품은
유네스코는 유엔창설 50주년이자 마하트마 간디 탄생 125주년이던 1995년을 ‘관용을 위한 국제연합의 해’로 정하고 그해 11월16일을 ‘국제관용의 날’로 지정했다. 국제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의미에서였다. 유네스코는 이를 계기로 2세들에게 관용 교육을 시킬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관용은 인권을 비롯해 평화, 민주주의 등 많은 가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링컨은 관용의 사람이라 불릴 정도로 상대방을 배려했다. 또 그는 자신과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을 공적으로 비난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수는 마음에서 없애야 한다는 그의 생활신조가 관용의 덕목을 키웠으며 더 나아가서 그 원수마저 바로 친구로 만들어버리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게 됐다는 것이다. 관용은 프랑스말로 톨레랑스(tolerance)라고도 한다. 이 말은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라는 뜻을 품고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를 존중하여 주자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우리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보이면 자신에 대한 도전이나…
2014년 갑오년이다. 매년 돌아오는 새해가 되면 조용히 앉아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자신의 나아갈 길을 가늠도 해보고 궁리도 하고 이것저것 계획도 세워본다. 가정에서의 위치, 사회적 지위 등에서 현재적 자기정립과 미래지향적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면서 희망을 갖기도 하고, 바라는 바 소원을 빌기도 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떤 동굴과 터널을 지나려 하는가? 사전적 의미로 ‘동굴’은 자연 현상에 의해서 땅이 넓고 깊게 파여 들어가 있는 구멍이요, ‘터널’은 산이나 땅속, 바다, 강 등의 밑을 뚫어서 만든 통로(通路)다. 동굴과 터널의 비슷한 점이라 하면 장애물이 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가 쉽지 않은 산이나 바다, 강 등의 장애물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동굴과 터널의 다른 점을 생각해 본다. 동굴이든 터널이든 들어가는 입구는 있다. 그 입구에 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굴을 이용하여 저곳으로 가야할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동굴을 선택하여 동굴로 들어가면 막다른 골목이 버티고 있다. 동굴 속에 장애물이 버티고 있는 셈이다. 저쪽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다. 동굴 속의 장애
지난달 20일 경기도의회 본회의장에서 의결된 조례안 가운데 4건에 대해 경기도가 조례규칙심의위원회를 열어 재의를 요구했다. 해당 조례안은 ‘경제민주화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 ‘상권영향평가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 ‘생활임금 조례안’, ‘공익적 반대 행위자 기록보관 등에 관한 조례안’ 등이다. 이번에 재의를 요구한 조례안 4건 이외에 2013년에 재의를 요구한 조례안은 3건에 그쳤으며, 2012년에는 단 1건의 조례안만 재의를 요구한 것에 비하면 무더기 재의라는 점에서 그 배경이 궁금하다. 더욱이 경기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재의 이유가 해당 조례안이 국가사무이거나 법령에 근거가 없는 “엉뚱한 조례안”이며 “일부 도의원이 실적을 위해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 발의한 조례안”이라는 설명에 해당 조례안 중 하나를 발의했던 필자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 첫째, 해당 조례안이 국가사무이거나 법령에 근거가 없는 ‘엉뚱한 조례안’이었는가. 지방자치단체의 조례 제정에 관해서는 지방
‘홀로선 나무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요즘처럼 반목과 갈등이 심화되고 ‘내 탓’보다는 ‘네 탓’이 넘쳐나는 시절일수록 더 많이 생각나는 말이다. 우리사회는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일을 이루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도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게 우리다. 작년 한해 우리사회는 참 많은 갈등이라는 번뇌에 시달리며 지내왔다. 그래서인지 기업과 단체, 기관 등이 발표한 올해 사자성어에는 유독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소망을 담은 것들이 많다. 광이불요(光而不耀:자신의 광채를 줄이고 주변과 조화를 이룬다), 집사광익(集思廣益:생각을 모아 이익을 더한다), 화동세중(和同世中:화합하여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간다), 동주공제(同舟共濟: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등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동행동행(同行同幸: 함께 가면 함께 행복하다), 동심동덕(同心同德:같은 목표를 위해 함께 힘쓰고 노력한다)’과 같은 조합된 사자성어도 등장했다. 우리 사회엔 새삼 거론치 않아도 소외되고 관심 받지 못하는 약자가 매우 많다. 세대 간, 계층 간, 성별…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힘든 세상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가 왜 이 지경까지 왔나, 한숨 깊은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2014년 새해가 밝았다고, 청마(靑馬)의 힘으로 더 열심히 뛰는 한 해가 되자고 언론에서 아무리 독려해도 도무지 흥(興)이 나지 않는다. 비단, 나만 그럴까. 중소기업인을 만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술청을 찾아 객(客)들과 토론을 펼쳐 봐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돌이켜보면 이런 무미건조한 생의 연속이 비단 한두해 전의 일만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무기력이 우리 사회의 뿌리부터 적시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왜일까. 그래, 어느 순간 우리 사회의 정신적 어른이 사라졌고, 무력감은 거기에 기인했다. 어느 시대나 정권을 향한 정치적 투쟁은 있었고 각자의 진영(陣營) 논리는 있었다. 하지만 나 같은 촌부(村夫)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신적 스승들의 문자거나 불립문자(不立文字)였다. 놀랍게도 한순간 그들이 사라진 것이다. 무력(無力)의 뿌리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를 만났다. 채현국 선생. 삶 자체가 삶이었다. 세치 혀가 난무하는 시절, 몸으로 삶을 밀어오신 어른을 만난 것이다. 아둔한 우리들이 그에 대해
/문정영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돌멩이 생김새만 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누가 나를 순하다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젖고 양귀비꽃은 양귀비꽃만큼 젖어서 후생이 생겨난다. 여름비는 풍성하여 다 적실 것 같은데 누운 자리를 남긴다. 그것이 살아가는 자리이고 다시 살아도 꼭 그만큼은 빈다. 그 크기가 무덤보다 작아서 비에 젖어 파랗다. 더 크게 걸어도 더 많이 걸어도 꼭 그만큼이라는데 앞서 빠르게 걸어온 자리가 그대에게 먼저 젖는다. -포엠포엠 2013·가을 Vol, 59 사람은 꼭 자기 그릇만큼의 삶을 산다고 한다. “저 녀석은 그릇이 그것밖에 안 돼.” 흔히 모든 사물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비가 적시지 못한 돌멩이의 자리, 내가 서 있는 발자국만큼의 공간, 후박나무 젖은 잎은 돌멩이라는, 나라는, 후박나무라는 본체의 극히 일부분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작고 보잘 것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의 결과는 꼭 그만큼의 자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