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과 그 지지자들의 말과 글이 살풍경하다. 그 어느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더이상 들을 수 없고, 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당 전유물이 모든 당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즈음이다. 민주당 대선 예비경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귀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대선 후보의 말과 글은 옮겨 적는 것조차 주저하게 된다. 상스러워도 너무 상스럽기 때문이다. 시민으로서, 유권자로서 모멸감이 인다.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말과 글도 그 후보의 것 못지 않게 폭력적이다. 유튜브나 포털 뉴스 댓글, 페이스북, 누리집 익명 게시판 등 아무 것이나 딱 10초만 들여다봐도 폭언이 튀어나온다. 피해가는 것이 더 어려운 실정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에 말과 글을 흉기처럼 휘두르나? 그런 후보에게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기에 폭언을 일삼나? 자신들만의 집단 광기로 권력을 잡아 이 나라를 전리품으로 통째로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확신이라도 하는 건가? 폭언은 폭력이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차원을 뛰어넘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를 무릎 꿇리겠다는 선언이다. 독선도 이런 독선이 없다. 그런데 이
1. “이 자들은 너무 적게 일하고 너무 많이 받으려 한다.” 산업혁명이 개시된 18세기 중반부터 250여 년 동안 고용주들이 유행가처럼 흥얼거리던 말이다. 뼈가 부서지는 초과 노동 아래 신음해온 노동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말을. 특히 1830년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노동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조차도 영국 노동자 1일 평균 노동시간은 12시간에서 최대 16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하루도 안 쉰다고 가정하면 112시간, 일요일 하루는 쉬는 것으로 계산해도 96시간이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수용자 사망 확률이 85%였던, ‘강제노동을 통한 절멸을 목표로 했던’ 아우슈비츠에서조차 주당 최대 노동시간이 98시간이었다. 나치가 인간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한계 이상의 노동이 강제되면 몸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전 세계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문제가 말 그대로 죽고 사는 생존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2.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정부의 주 52시간 노동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중간에 “주당 120시간 근무” 운운을 들이밀었다. (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서,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하던 그 말슴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 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음(陰)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소아 나오는 정(精), 맨송맨송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神),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다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 없어 말구유 안으로하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 천지창조하려는 ᄒᆞᆫ님 곧 물 위에 운동하셨다는 그 운동은 무슨 운동이었나? 반항운동이었다. 암탉이 알을 까려 품고 앉은 듯한, 무슨 큰일을
불과 10년 뒤면 50대 이상 인구가 나라 전체의 절반을 넘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네요. 일찌감치 벌어진 잠룡들의 혈전 속에 흘려넘기고 있지만, 예사로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고령화 현상이 이런 속도로 가파르게 심화하면 경제인구가 대폭 줄어들게 되고, 머지않아 국가소멸 위기를 불러올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이니까요. 인류의 삶을 피폐화시키고 있는 코로나 펜데믹 그 끝에 필경 닥쳐올 생존의 위협은 가늠조차 쉽지 않은 요즘 아닙니까? 행정안전부 발표에 등장하는 올 6월 30일 현재 우리나라 주민등록 인구 통계가 아찔합니다. 40대 이하는 큰 폭으로 감소하고, 50대 이상은 대폭 증가하는 추세예요. 50대는 모두 859만314명으로 전체 인구의 16.6%를 차지하고 있어요. 40~50대는 다 합치면 32.5%로서 비중이 가장 높네요. 이어서 20~30대가 26.2%, 60~70대가 20.7%입니다. 10대 인구는 계속 줄어들어 9.2%에 불과하고 10대 이하는 16.6%, 80대 이상은 4%로 나타났군요. 이 자료를 놓고 최병관 행안부 지방행정정책관은 “10년 뒤에는 50대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보이고, 평균연령이 50세를 넘어서는 지
1. 드라마 극 중 어떤 성씨 남자가 진상 캐릭터라면 문중에서 반발하고, 깜깜이 코로나 확산이라는 발표에 대해 장애인단체가 혐오표현이라 비판한다. 참 예민한 시대를 살고 있다. 방송통신 심의위에 접수된 민원내용을 보면 “시청하기 불편해서”가 상당수다. 내가 싫고 불편하면 다 민원의 대상인 것이다. 단골 민원인도 있다. 민원이 능사다. 민원으로 접수되면 그것이 비상식적 특정인의 문제라 하더라도 처리기준에 의하여 불필요한 행정력이 낭비된다. 앞으로 구성될 방심위는 시청자 민원에 대한 확고한 처리기준을 설정하기 바란다. 민원에 휘둘리지 말고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상식으로 판단하자. 2. 심의 의결 사례를 보면 방송보다 통신이 100 여배에 달하지만 위반에 대한 징벌 수준은 방송보다 약하다. 방송은 양식 있는 내부종사자에 의한 자체심의가 있지만 통신영역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튜브는 그런 게 없다. 그나마 MCN 회사가 제작에 관여하는 콘텐츠는 최소한의 고민이라도 하지만 개인 크리에이터들은 심의규정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이건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다. 방송의 단골 민원인이 이런 유튜브 콘텐츠를 본다면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 숨이 막힐 것이다. 시대의 대
“쥐약을 지급하라. 쥐 때문에 못 살겠다.” 광주교도소 특별사동 10번 방. 나는 식구통에 대고 크게 외쳤다. 밥그릇으로 교도소 창살을 득득 긁었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특사를 지나 기결사동까지 퍼져갔다.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발로 문짝을 ‘쾅 쾅’ 찼다. “페스트 걸리면 교도소가 책임져라.” 나는 1시간 동안 쉼 없이 외치고 두드리고 찼다. 보안과 직원이 한번 들여다보고 갔다. 잠시 후 보안과장 호출이 있었다. “야, 고형권! 어떻게 쥐약을 주냐? 네가 먹고 죽으면 누가 책임지냐?” “그럼 쥐를 전부 잡아 없애던가.” 보안과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은 듯 나를 사동으로 돌려보냈다. 교도소에는 살찐 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밤에 뺑기통(화장실) 조그마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포동포동 살 오른 쥐들이 교도소 감시탑 조명 아래로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쥐들의 주요 루트는 하수구였다. 교도소에서는 뺑기통에 밥 먹고 남은 잔반도 버렸다. 모든 뺑기통은 하수구로 서로 통했다. 겁이 없어진 쥐들은 하수구로 올라와서 뺑기통까지 침투했다. 똥을 싸다가 어느 쥐의 영롱한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서 질겁을 한 적도 있었다. 쥐는 교도소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 있
세일 없는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세일이 없는 세상은 우선 정직한 세상일 것이다. 30%, 60% 심지어 80%라는 세일 광고를 보았을 때는 온몸에 힘이 빠진다. 재고품을 정리하느라 5%, 10% 정도 값을 싸게 해서 고객에게 서비스하는 것은 소비자에게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똑같은 물건이 50%나 값이 내려가서 먼저 물건을 산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면 그것은 엄연한 횡포다. 처음부터 정당한 가격을 책정해 놓고 그 값을 고수하는 것이 소비자에 대한 상도의이며 예의다. 물건이 너무 많아서 그 물건을 처치하기 곤란할 것 같으면 물건을 조금만 만들든지 아예 만들지 않으면 될 일이다. 넘쳐나서 쓰레기처럼 쌓인 물건들과 그 물건들을 휘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도 함께 싸구려 세일이 되어 어느 시궁창으로 둥둥 떠내려가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언짢다. 더욱 겁나는 것은 가격파괴니 노마진 세일이라는 새로운 어휘들이다. 어떻게 보면 소비자들을 더욱 현혹하고 부추기는 것 같고 이런 어휘의 범람은 속임수와 거짓의 난장판인 것 같아 현기증이 난다. 값이 싼 물건이 횡재일지 모르지만 그런 물건에 대해서는 애당초부터 어떤 소중한 마음을 간직할 수가 없다. 물건은 어디까지나
단고기란 북쪽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반려견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고기가 개고기라고 하면 혐오의 눈길부터 보낼 것이다. 그러나 남쪽에서 개고기 식용이 사라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고 불과 몇 년 전 까지만도 보신탕이라는 간판이 걸린 식당이 있었다. 무더위에 발잔등에 떨어져도 약이 된다는 단고기는 삼복을 이길 수 있는 보양식으로 남북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 좋아하고 즐겨한 음식 중 하나이다. 남쪽에는 보신탕집이 사라졌지만 북쪽 사람들은 지금도 삼복 음식으로 단고기를 좋아한다.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도 적으니 식용을 거부하거나 혐오는 사람도 없다. 번식력이 뛰어나 한 번에 12마리씩 낳고 한 달이 좀 지나면 토실토실한 강아지를 이웃과 나누었다. 주인에게 충실한 개는 목줄을 하지 않아도 떠나지 않고 집을 지킨다. 사람을 좋아하고 죽을 때를 알면 슬며시 도망갔다가 다시 찾아온다. 이런 명물이 식용으로 쓰일 때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기도 한다. 일만 하다가 식용이 되는 소 보다는 덜 아쉽겠지만 주인집 밥을 얻어먹고 자라 고기까지 내놓는 개를 아니 키울 수 없다. 그래서 주인에게 꼬리곱터를 열심히 젓는 충견에게 개고기가 아닌 다른 언어
현 정부는 국정의 제1과제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것으로 잡았다. 헌법에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돼 있건만 이 땅의 권력은 대통령을 비롯한 ‘선출 권력’보다는 세습 재벌과 세습언론, 기소와 수사권을 모두 거머쥔 검찰과, 구태 관료 그리고 뿌리깊은 수구 정치세력들의 손아귀에 그대로 남아 있다. ‘더 센 살아 있는 권력’인 기득권 세력은 민주정부로의 정권교체에도 아랑곳없이 민중의 삶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1945년 나라가 오랜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음에도, 일제에 빌붙어 민족을 배반한 부역 관료, 일제 군인과 경찰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똑같이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얻은 재력과 권력을 동원해 자녀들을 다시 지배층으로 키우는 데도 성공했다. 빈익빈 부익부는 해방 후 한국사회 작동의 메커니즘이었다. 비정상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것은 분단의 고착화이다. 같은 문화와 언어, 생활양식을 지닌 민족은 하나가 되는 것이 인류역사의 순리이다. 그러나 외세가 개입된 동포살육의 집단적 트라우마는 한반도를 지구상에서 마지막 ’냉전의 섬’으로 굳어지게 했다. 민족 내부가 극심한 분열로 갈라지고 찢겨져 최악의…
지난 6월 29일 평양 노동당 청사에서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는 대선 열기가 뿜어 나오는 와중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중대사건’ ‘간부혁명’ ‘책임간부들의 직무태만 행위’ 등 과 같은 무거운 용어들은 북한의 권력층 내부에 심상찮은 변화가 있음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그 시그널은 공개된 확대회의 장면이다. 최상건 비서 겸 과학교육부장의 자리는 비워있었으며 리병철 부위원장과 박정천 총참모장은 거수 장면에서 손을 들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7월 8일 김일성 27주기 참배식에도 최상건은 보이지 않았고, 리병철 부위원장은 군복이 아닌 인민복을 입고 3열로 밀려났으며, 박정천 총참모장은 원수에서 차수로 강등된 것이 확인되었다. 김 씨 일가의 전통적 엘리트 통제 수법인 ‘강등과 복권’ 전술을 적용한 셈이다. 철직 당하면 할 것도 없고 대체재도 없는 북한에서 엘리트들의 ‘강등과 복권’ 전술은 매우 유요한 통제 수법이다. 리병철은 일단 코로나 방역과 관련한 내용을 자기 선에서 뭉갠 것이 원인이라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 리병철의 생각은 김정은의 근심을 들어주고자 보고하지 않았는데, 코로나 방역 문제를 국가비상방역전으로 인식하는 김정은의 진노를 샀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