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하면 생각나는 스포츠 종목과 스타가 있다. 당연히 100m와 200m 단거리 종목의 황제인 우사인 볼트다. 이외에도 자메이카에는 세계적인 육상 단거리 선수들이 많이 있다. 그러면 왜 자메이카에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육상 단거리 선수들이 많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던 차 2012년 한국체육대학교를 방문한 자메이카 산업대학교 총장인 쿠퍼 박사의 자메이카 육상 선수의 유전과 식이요법에 대한 강연이 있었고 그 강연을 통해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보면 쿠퍼박사는 자메이카가 세계적으로 우수한 육상 단거리 선수들이 많은 이유를 첫 번째 자메이카 정부의 육상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인재 육성·발굴, 두 번째 자메이카인의 독특한 유전적 성향과 우생학적 특성, 세 번째 전략적으로 섭취하는 천연물에 기인한다고 설명하였다. 필자는 스포츠 영양학에 관심이 있는 터라 세 번째 이유에 흥미를 느꼈고 특히 우사인 볼트가 전략적으로 무엇을 섭취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드디어 쿠퍼 박사는 우사인 볼트가 전략적으로 섭취하는 천연물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필자는 듣고서 의아해 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벨기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자 경제학자 콜망(Bruno Colmant)에 따르면, 벨기에 사회시스템은 사회보장제도의 개별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처럼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파경을 맞지 않는다면 아주 잘 작동한다. 그러나 지금은 정지 직전. 코로나 보건 위기로 많은 사람이 일자리와 소득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인들은 기본소득 카드를 꺼낼 찰나. 그간 벨기에 정부는 경기부진 때마다 여러 지원책을 내놓곤 했지만 기본소득 개념에는 다가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절박한 상황.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지금이야말로 기본소득 개념을 부각시킬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2월 벨기에 중도우파 정당 MR(Mouvement réformateur: 개혁운동)은 기본소득 연구를 시작했다. 근시일내에 기본소득을 실시하려는 목표다. 이들이 생각하는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매월 수당을 지급받는 것이다. 브뤼셀 자유대학(Université libre de Bruxelles) 법학과 뒤몽(Daniel Dumont) 교수는 “이 기본소득은 보편수당으로, 개개인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요약한다. 즉, 가족을 부양하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거기서 초인간적인 무언가를 의식하게 된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신도 역시 존재한다. 그것을 신이라 부르건 뭐라 부르건, 어쨌든 우리 안에 우리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 생명의 원천을 신이라 부르건 뭐라 부르건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마치니) 숲을 거닐면서 내 눈을 피해 전나무의 뽀족한 잎 속에 몸을 숨기려고 다급하게 움직이는 딱정벌레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묻는다. 어째서 이 딱정벌레는 이렇게도 겁을 먹고 나에게서 숨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그 녀석의 은인이 되어 그들의 무리에게 무척 기쁜 소식을 전해줄지도 모르는데. 그럴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위에, 즉 이 딱정벌레나 다름없는 인간 위에 서 있는 위대한 은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로) 신은 마치 그물과 물의 관계와 같다. 뜨고 있는 동안 물은 그물 속에 있지만, 떠냈을 때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색과 행위를 통해 신을 찾고 있는 동안에만 신은 우리 안에 있다. (표도르 스트라호프) 이 세계와 우리의 삶 뒤에 왜 이 세계가 존재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왜 부
똑순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뭐라고 몇 마디 하더니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내 손에 건네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이름은 나도 모른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어린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똑순이 반장이라고 불렀다. 똑순이는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들어왔다고 했다. 150이 될까 말까 한 작은 키였다. 하지만 얼마나 야무지고 똘똘했는지 10년 만에 상동공장 반장이 되었다. 억세다는 아줌마들도 똑순이에게는 꼼짝하지 못했다.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석고 틀을 번쩍번쩍 들어 날랐다. 노조 대의원이었다. 그러나 데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석현공장에서부터 임금인상과 노조민주화 투쟁이 시작됐지만, 똑순이는 나서지도 않았고 다른 남자 대의원들처럼 아줌마들이 데모에 참가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모두 본사까지 가두 시위에 나설 때도 똑순이는 묵묵히 자기 일만 했다. 상동공장 경비실 옥상에 올라가 데모를 할 때도 공장 창문으로 쳐다만 보던 똑순이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데모를 주동하다 해고되었고 복직 투쟁 30일째였다. 저녁 퇴근 시간에 상동공장 앞에 와서 피켓시위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검정 비닐봉지를 열어보았다. 하얀 우
언론이 객관적일 수 있을까?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정성과 균형성도 마찬가지다. 관점에 따라 다 다르다. 북한산을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처럼. 불가능한 언론의 객관성을 마치 가능한 것처럼 포장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특정 이념을 지향(주관적)하면서도 객관을 빙자해 때로는 심판처럼 행세하려 든다. 언론이 활용하는 객관용 포장재는 ‘취재원’이다. 기자의 이념성향에 맞는 취재원의 말만을 인용해 그 사안을 일반화하려 든다. 기자는 여러 방식으로 다양한 취재원을 만난다. 사건 현장이 가장 바람직 하지만 모든 사건 현장에 다 있을 수는 없다. 각종 통신수단을 활용해 취재원의 목소리를 듣는다. 코로나가 창궐한 후로는 비대면 취재가 더 느는 추세다. 어떤 방식으로 취재를 했던 문제는 기사 방향을 미리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취재원만을 인용해 객관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한 예로 KBS시청료 인상 문제는 찬반의 대립이 있다. 이런 사안을 보도하면서 특정 입장을 대변하는 전문가 의견만을 인용한다. 그 전문가의 이념 성향을 알 수 없는 독자들에게 방송계 전체 의견인 것처럼 포장한다. 취재원의 다양성과 관점의 다양성은 언론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전제다.…
4,7 보궐선거가 끝났다. 무능한 정권보다는 부패한 정권이 낫다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언론들은 그 결과를 두고 문 정권의 실정 특히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원인으로 꼽고 있다. 기울어진 언론지형을 탓하더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것은 청년층의 이탈이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출구조사에서 18~20대 남성 청년층은 야당후보를 70% 이상 지지했다고 한다. 촛불정권을 만든 청년들이 이제 촛불정권을 버린 것이라며 청년층이 보수화되고 있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4, 50대와 달리 그들은 민주화운동과 감정적으로 연결되지 않았기에 권위주의 정권의 폐를 이해하는 역사의식이 부족하고, 찰나적인 욕망에 부응하는 MZ(밀레니엄 세대)세대들의 특성이라고 말한다. 과연 청년층이 보수화된 것일까?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아프고 상처난 곳을 어루만져주고 사회 전체의 힘으로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강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끊임없이 약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 코로나 정국에서 전 국민이 힘들고 지쳐가고 있었다. 자영업자, 직장인, 공무원, 의료진, 알바생까지 모든 국민이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외
“광산의 조건이 지금보다 더 나빴던 것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 깊은 지하 갱도에서 말 등에나 씌우는 마구(馬具)를 둘러메고 팔 다리로 기어서 탄차를 질질 끄는 그 지독한 노동에 시달렸던 노부인들이 아직도 몇 사람 살아 있다.” 조지 오웰이 1937년 출간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The Road To Wigan Pier)》의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은 영국 북부 탄광지역 위건의 빈민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사한 르포 문학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그녀들은 임신 중일 때도 이 일을 계속하곤 했다. 요즈음에도 만약 임신한 여성들이 탄차를 끌어야만 석탄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석탄 없이 지내기보다 차라리 임신부들이 탄차를 끌게 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럴까? “우리 모두가 비교적 고상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목구멍에는 석탄 먼지가 가득하고 눈까지 시커멓게 된 채 강철같은 팔과 배의 근육으로 삽질을 해대면서 지하에서 악착스럽게 일하는 이 가련한 사람들 덕택이다.” 그러면 그 ‘가련한 사람들’은 왜 이리 일해야 하는가? 그 까매진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찌 하랴. 조지 오웰은 수입이 끊기는 공포를 이렇게 단적으로 짚는다. “가장 훌
우리의 삶이 정신적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불멸을 믿게 된다. 우리의 본성이 동물과 같은 성질에서 멀어짐에 따라 불멸에 대한 의심은 점점 사라져간다. (마르티노)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내세를 믿는 근거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의 존재와 나의 불멸이 의심할 나위 없는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다만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불멸한다는 것을 도덕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것은 곧 신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나에게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내 본성과 굳게 맺어져 있음을 뜻한다. (칸트)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 알고 있는 것의 전부는, 내가 아직 본 일이 없는 것, 모르는 것을 믿으라고 나에게 가르친다. (에머슨)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입장은, 학자가 자신의 학문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방에 들어간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는 그 얘기의 시작을 듣지 못했고 또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나간다. 그는 무엇인가 듣기는 듣지만 들은 것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신에 관련한 말은 우리가 공부를 시작한 것보다 몇십 세기 전에 시작이 되
왜 그럴듯한 남성조차 여성존중에 실패하는가?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은 당대표가 자신을 성추행한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국민들에게 발표한 글에서 위와 같이 물었다. 사실 나도 계속 그것이 오래동안 궁금했다. 왜 그럴듯한 그들이 여성을 존중함에 실패하는가? 선한 가치의 추구, 인간 진보에 대한 희망과 그것에 대한 실천을 표방하는 이들이 왜 바로 옆의 여성을 존중하는데 성공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궁금한 그것을 물을수도 없었고 행여 아주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물어도 대답은 석연치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니가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많도 많이 들었다. 그러던차에 나의 오랜 내적물음을 표면화시킨 장의원의 글들은 나만 아팠던 것이 아니구나 나만 궁금했던 것이 아니구나 위로가 되었다. 문제제기를 하는 국회의원이 대한민국 국회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희망을 보았다. 급진적 여성주의를 표명하던 한 여성의원은 한 한의사모임에 참여해서 그 모임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나에게 건배를 청하며 자신이 여성주의를 내세우며 핍박을 받은 역사를 알려 주었다.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과거에 어떤 시선을 받았는지 알기에 그녀의 용기에 지지를 보내었다. 그 말들 이
1. 기적은 없었다. 충격적인 것은 단순히 패배의 외형이 아니라 내용이다. 부산 시장선거의 경우는 거의 더블 스코어로 졌다. 이번 선거는 극우정당의 대 승리가 아니라 민주당의 대 패배인 것이다. 국민의힘 후보들은 역대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른바 MB의 정통 후계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정부와 민주당이 싫어서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다. 나온 사람들은 반대정당에 몰표를 던졌다. 탐욕이 승리한 선거라고 평하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는 언론과 검찰이 문제라고까지 말한다. 패배의 원인을 외부에 돌리는 시각이다.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당과 청와대에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에 실망하고 분노한 철저한 응징 투표였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적 거부에는 백약이 무효였던 게다. 지난 지선, 대선, 총선과 비교해서 가장 극적인 민심이반이 일어난 곳이 2, 30대 청년 계층이다. 특히 20대 남성 유권자의 경우 70퍼센트 이상이 국민의힘 후보에 표를 던진 걸로 나온다. 서울과 부산 모든 지역구 단위에서 처참한 패배는 청년층의 이 같은 투표 결과로 봐야 한다. 2. 선거 전 여론조사를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