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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 억겁의 세월품은… 북한산성을 거닐다

성곽따라 펼쳐진 단풍 막바지 절경
13개 성문 지나면 ‘삼국시대 아련’
금위건기비·행궁지등 유적 볼거리

 

 

역사 살아 숨쉬는 북한산성

가을 단풍이 막바지 절정에 달하는 요즘, 단풍이 물든 산을 찾는 등산객이 늘어나고 있다.

조금 쌀쌀한 날씨 속에 두꺼운 옷을 입고 너도 나도 막바지 가을 등산에 마음이 부풀어오른다.

이처럼 조금 추운 날씨지만 산을 올라 자연을 느낄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북한산 북한산성’이다.

북한산성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소재의 토축산성이다.

사적 제162호이다. 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성(築城)됐다.

이때 백제의 주군력(主軍力)이 이 성에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으며, 그뒤 근초고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북벌군의 중심요새가 됐다.

1232년 고려 고종 때는 이곳에서 몽골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해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긴 일도 있는데 이때 성의 중축(重築)이 있었고, 1387년 우왕 때는 개축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이 대두해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천620보(步)가 완성됐다.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동북문(東北門)·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다.

성내 중흥사(重興寺)는 승군(僧軍)을 배치한 136칸의 대찰이었으며 12개의 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성곽의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무너졌으나, 대서문이 남아 있으며, 성체(城體)는 완전히 보존됐다.

북한산성에 볼거리 중 ‘북한산성의 금위건기비(北韓山城禁衛營移建記碑)’가 있다.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내의 금위영(禁衛營) 건물을 옮겨 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석비다.

기념비는 북한산성 내 대성암(大成庵) 아래에 있다.

북한산성은 삼국 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시됐다.

백제 때에는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요충지로서 개루왕(蓋蔞王) 5년(132)에 성곽을 축성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 성을 중심으로 고구려군과 당군을 막아냄으로써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뤘다.

형태는 옆으로 긴 장방형 비신(碑身) 위에 가옥의 지붕 형식을 취한 옥개석을 올렸으며 재료는 화강암이다.

옥개는 장대석(長臺石)에 앞편에만 낙수면을 새겼다.

 

 

 


즉 와비(臥碑)의 형식으로 비문의 끝부분에 “을미즉 대명숭정 갑신후 칠십이년야 도제조이이명 지(乙未卽 大明崇楨 甲申後 七十二年也 都提調李餌命 識)”란 명문으로 보아 숙종 41년에 도제조 이이명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비문 내용으로, 금위영은 능암 동남쪽에서 보현봉 아래까지 2천821보(步)를 쌓았으며 1천65개의 살밭이와 2개의 성문(대성문, 소동문)이 있었고, 성문 위에 누각을 설치했다.

이외에 장대(將臺), 방실(房室),성곽 등을 축조했으며 현재 뒷면은 땅에 묻혀 있고 비문도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렵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북한산성 행궁지(北漢山城幸宮址)’다

조선 숙종 때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북한산성 내에 지은 궁터다.

태고사(太古寺)에서 대성문(大成門)으로 오르는 등산로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땅위로 드러나 있는 건축물은 현존하지 않으며 약 9천917.4m²에 이르는 터만 남아 있고 일제강점기까지 그 건물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언제 훼손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행히 일제강점기에 찍힌 사진이 남이 있어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궁(離宮)이라고도 불리는 행궁은 임금의 임시 숙소로 임금이 거처하는 궁의 격에 맞추어 지은 관아건축이다.

전시에 임시 피난처 및 지휘소로 짓기도 하지만 피서나 피한(避寒) 또는 요양을 위해 짓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특히 고려 시대에 많은 이궁이 지어졌고, 조선 시대에는 수원의 화성(華城)을 비롯해 몇 군데 행궁이 있었다.

‘북한지(北漢誌)’에 보면 ‘좌우상방(左右上房) 각 2칸, 대청 6칸, 사면퇴(四面退) 18칸, 도사(都舍) 28칸’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내전의 정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내진(內陳) 사방에 각 1칸씩을 덧달은 구조로 추정된다.

현재는 내·외전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축대 일부, 좌우의 담장터 등이 남아 있고 건물터 곳곳에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다.

내전터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초석열이 정연하게 나타나고 있고, 기단과 석축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주변명소
화계사
서울 강북구 수유동(水踰洞)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대지 2,970㎡의 경내에 당우(堂宇)로는 초기 건물인 팔작지붕 다포계(多包系)의 대웅전 외에 명부전(冥府殿) ·삼성각(三聖閣)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 ·범종각 ·보화루 ·학서루(鶴棲樓) 등이 있다.
인수봉
북한산(北漢山)에 있는 산봉우리.
높이는 804m이다.
백운대(白雲臺)·만경대(萬景臺)와 함께 예로부터 삼각산(三角山)·삼봉산(三峰山)으로 불려왔다.
화강암의 암벽이 노출된 경승으로 동쪽 산기슭에는 우이동(牛耳洞)이 있고 남동쪽 기슭에는 도선사(道詵寺) 등이 있어 많은 등산객이 찾아든다.
또 한국의 대표적인 암벽등반 대상이다.
만경대
만수봉(萬壽峰)이라고도 한다. 해발고도는 800m이다. 북한산에 있는 고봉으로 북쪽의 인수봉과 백운대·만경대를 합쳐서 삼각산(三角山)이라고 한다.
산은 부근 여러 봉우리와 같이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랜 풍화·침식·삭박(削剝) 작용으로 절벽을 이루나 정상은 비교적 평탄하다.
1375년(고려 우왕 1)에는 큰 비로 봉우리가 무너졌다 하고 1597년(조선 선조 30)에는 이 산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어 울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와 기설제(祈雪祭)를 지냈다.
남동쪽 산 중턱에는 고찰(古刹) 도선사(道詵寺)가 있고 능선상에 북한산성의 하나인 용암문이 1994년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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